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기영 시인 / 그들의 이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3.

이기영 시인 / 그들의 이별

 

 

들꽃은 꽃잎으로

바람을 움켜잡습니다

 

바람은 놓아 달라 합니다

들꽃은 뿌리 탓에 따라가지 못하고

 

흔들게 하다

흔들리다

속절없이 서로의 손을 놓아버립니다

 

바람 불 때 들판에 가보세요

이별도 아름다운 소리 낼 때 있답니다

 

-시집 <몸으로 우는 것들은 원을 그린다>-

 

 


 

 

이기영 시인 / 별빛에 싸여 있던 이야기

 

 

산중턱 마을이 저물면

별들이 먼저 달려온다

 

평상에서 잠자다

오줌누러 감나무 밑에 가면

은하수는 흐르다 산봉우리에서

여러 조각으로 흐르고

 

장마 질 때 불어난 강

건너 매어진 빈 배

뱃사공 부르던 머슴아는

누굴 만나러 애태웠는지

할머니께서 들려주지 않아도

마을 입구 나리꽃은

여전히 별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시집 <몸으로 우는 것들은 원을 그린다>

 

 


 

 

이기영 시인 / 느린 우체통

 

 

꽃편지지에

간절한 시 한 편 싣고

머뭇거리던 손길을 기억하다

붉은 노을 우체통 더해

잊었던 주소 뒤에 남겼던 이름

 

우편함 앞에서 인기척 느끼면

두근거리는 가슴까지

 

시간 따라 한 칸씩 계단을 그어

층층이 오르다

 

꽃편지지보다 아름다운 시를 쓰고

우체통 앞에서

다시 서성이고 싶었지

 

-시집 <몸으로 우는 것들은 원을 그린다>

 

 


 

이기영 시인

2013년 《열린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와 디카시집 『인생』이 있음. 2016년 전국계간지우수작품상 수상. 2018년 김달진창원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