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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15159

채종국 시인 / 네 시 외 1편 채종국 시인 / 네 시 네 시를 마중 나간다 멀리서 나를 반기는 네 시를 따라 길을 나선다 네 시가 강변에 닿을 때쯤이면 가로등 눈빛이 맑아지고 별들이 귀를 밝힌다 네 시의 눈을 바라다보면 눈동자에 비치는 당신의 얼굴 네 시는 당신을 이야기하고 나는 당신을 뒤척인다 당신을 뒤척일 때마다 별들이 지상에 가까워진다 강물의 어깨가 출렁인다 네 시가 당신을 말할 때 별들의 귀를 훔쳐 당신을 듣는다 잠에서 깬 새들이 기지개를 켠다 나와 당신과 네 시 네 시가 올 때쯤이면, 당신이 가장 그립다 당신은 지금 달빛도 눈이 먼, 새벽 네 詩 계간 『시와 징후』 2023년 봄호(창간호) 발표 채종국 시인 / 사과 나비를 숨긴 정물의 둥근 사각 소리. 말머리성운 너머 붉고 푸른 항아리 성운 지나 별의 죽음을 안갯속에 감추고.. 2023. 5. 22.
장석주 시인 / 명자나무 외 2편 장석주 시인 / 명자나무 불행을 질투할 권리를 네게 준 적이 없으니 불행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마라! 불행 앞에서 비굴하지 말 것, 허리를 곧추세울 것. 헤프게 울지 말 것. 물음으로 타인의 연민을 구하지 말 것. 꼭 물어야 야만 한다면 흩날리는 진눈깨비 앞에서 울 것. 외양간이나 마른 우물로 휘몰려가는 진눈깨비를 바라보며 울 것. 비겁하게 피하지 말 것. 저녁마다 술집을 순례하지 말 것. 서양 모자를 쓰지 말 것. 콧수염을 기르지 말 것. 딱딱한 씨앗이나 마른 과일을 천천히 씹을 것. 다만 쐐기풀을 견디듯 외로움을 혼자 견딜 것. 쓸쓸히 걷는 습관을 가진 자들은 안다. 불행은 장엄 열반이다. 너도우니? 울어라, 울음이 견딤의 한 형식인 것을. 달의 뒤편에서 명자나무가 자란다는 것을 잊지 마라. 장석주 .. 2023. 5. 21.
한강 시인 / 거울 저편의 겨울 4 외 5편 한강 시인 / 거울 저편의 겨울 4 -개기일식 생각하고 싶었다 (아직 피투성이로) 태양보다 400배 작은 달이 태양보다 400배 지구에 가깝기 때문에 달의 원이 태양의 원과 정확하게 겹쳐지는 기적에 대하여 검은 코트 소매에 떨어진 눈송이의 정육각형, 1초/ 또는 더 짧게 그 결정의 형상을 지켜보는 시간에 대하여 나의 도시가 거울 저편의 도시에 겹쳐지는 시간 타오르는 붉은 테두리만 남기는 시간 거울 저편의 도시가 잠시 나의 도시를 관통하는 (뜨거운)그림자 마주 보는 두 개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서로를 가리는 순간 완전하게 응시를 지우는 순간 얼음의 고요한 모서리 (아직 피투성이로) 짧게 응시하는 겨울 의 겉불꽃 한강 시인 / 거울 저편의 겨울 5 시계를 다시 맞추지 않아도 된다. 시차는 열두 시간 아침 여덟.. 2023. 5. 21.
최승호 시인 / 눈사람 자살 사건 외 2편 최승호 시인 / 눈사람 자살 사건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들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들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2023. 5. 21.
석민재 시인 / 석류와 석류 외 2편 석민재 시인 / 석류와 석류 씨 하나가 말 한마디씩 다 해야 석류 머리 터진다네 아홉 번째 열두 번째 씨앗도 오늘내일 오늘내일 오지 않은 미래가 궁금하고 하나같이 울며 왔다 울며 가는 사람 살아 움직이는 것은 원수처럼 붙어 서로를 오염시킨다네 알 알 알 이 세계는 단단하지 않다네 죽지않을 만큼 쑤셔 박힌 폭탄 쩌억 벌리고 앉은 아저씨가 사람들이 비웃는 이유를 모르고 계속 가듯 이 붉음은 한목소리가 아니라네 하나의 역사 하나의 사연 하나의 중심 이건 싫다네 잠가 닫아 우리위해 기도해도 아무것도 돌아오는 게 없듯 함께 햇볕 받고 자라도 우리 안의 근심이 모두 달라 천 가지의 표정과 한 가지의 얼굴과 같은 죄로 묶을 수 없다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네 너는 여자라서 빨강이 아니라서 알몸으로 조.. 2023. 5. 21.
이경림 시인 / 사람 지나간 발자국 외 2편 이경림 시인 / 사람 지나간 발자국 아름다워라 나 문득 눈길 머물러 그것의 고요한 소리 보네 누군가가 슬쩍 밟고 갔을 저 허리 잘록한 소리 한참 살다 떠난 부뚜막 같은 다 저문 저녁 같은 -시집 (창비) 中 이경림 시인 /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7월이 왔다. 뭔가 또 다른 한 획이 그어지는 날인 듯하다. 정치적으로는 대선 예비경선과 본 경선을 거치며 난무할 흑색선전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할게 뻔하고, 코로나19 방역으로 백신 접종률은 높아가도 아직도 안심하기는 이르다는 듯 홍대발 원어민 확진자가 집단으로 발생하고, 장마철이 다가오고 무더위와 매미의 울음도 기다리고 있는 계절.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가볍게 시집을 한 권 펼쳐든다. -시집 에서 이경림 시인 / 안 -푸른 호랑이 20 ​ 1 미이이.. 2023. 5. 21.
강미정 시인 / 검은 안경을 낀 아버지 외 2편 강미정 시인 / 검은 안경을 낀 아버지 아빠는 검은 안경을 끼고 오셨어요 어둔 밤이 와도 검은 안경은 벗지 않으셨어요 내가 아빠 얼굴을 바라볼 때면 검은 안경을 낀 아빠는 얼른 고개를 숙였어요 아빠는 왜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세요? 아빤 왜 검은 안경을 끼세요? 하면 내가 너무 눈부셔서 고개를 숙인 거래요 내가 너무 눈부셔서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 거래요 너무 눈이 부시면 눈을 다치거든요 아빠가 그랬어요 나와 헤어질 때 검은 안경을 낀 아빠의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도 내가 너무 눈부셔서 눈을 다친 거래요 선물 많이 사 가지고 또 올게, 눈이 다 나으면 올게 약속했는데요 아직 눈이 다 낫지 않았나 봐요 아빠를 기다릴 때 해를 바라보는데요 눈 다친다, 내 등을 쓸어주시던 아빠 손이 느껴져서.. 2023. 5. 21.
정윤서 시인 / 서울 갤럭시 정윤서 시인 / 서울 갤럭시 잔별들은 미르의 먹이다 물속에 미르가 있다 공간을 가둘 수 있는 자만이 이룩하는 직선의 마천루 붉은 경광등이 번뜩인다 시간이 풀렸다가 감긴다 방재실의 잿빛 시큐리티 요원들은 비상구와 스프링클러 화재감지기의 작동을 점검한다 금빛 비상구는 빅뱅로 첨탑에 봉인되었다 255층 내실에는 양키 캔들이 커튼과 춤사위를 벌이고 있다 위험을 감지한 AI가 전송하는 코드블루 one 코드블루 one 에어 락을 건다 매뉴얼에 따른 미르가 물속에서 공중으로 몸집을 키운다 불과 물의 노래가 첨탑을 유영한다 체류 기록과 유언의 혀를 미르 입속으로 쏙 들이민다 미르 눈을, 눈을 떠 꼭 안아 줘야 해 우주에 정박하던 미르는 오랫동안 스스로 말하지 못했다 스스로 두 눈을 할퀴다가 핥는 미르는 풀리고 잠기기를.. 2023. 5. 21.
김경주 시인 / 드라이 아이스 외 1편 김경주 시인 / 드라이 아이스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 없는 법이다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낀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 할 것 골목 끝 수퍼마켓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냉동식품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타 붙는다. 저렇게 차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내 부정해버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끝에 닿은 그 짧은 순간에 내 적막한 열망보다도 순도 높은 저 시간이 내 몸에 뿌리내렸던 시간들을 살아버렸기 대문일까 온몸의 열을 다 빼앗긴 것처럼 진저리친다. 내안의 야경(夜景)을 다 보여줘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골목에서 나.. 2023. 5. 21.
​​차유오 시인 / 흩어진 마음 외 2편 ​​차유오 시인 / 흩어진 마음 ​ ​ 햇볕이 뜨겁게 쏟아지고 발자국에 밟혀 죽은 풀이 바짝 말라간다 풀을 죽인 적이 있는 것 같다 ​ 아이들이 거대하고 울퉁불퉁한 원이 되어 풀 위에 앉는다 ​ 도시락이 없는 아이들은 젓가락을 들고 돌아다닌다 젓가락이 도시락이라고 ​ 한 아이가 음식이 흐트러졌다고 울기 시작한다 제자리를 지키지 못한 음식이 아이를 울린다 ​ 흐트러진 음식은 꼭 흩어진 마음 같고 돌려놓아도 돌려지지 않는 나무에 기대서 눈을 감으면 누군가 귓속으로 들어온다 집중하면 소리를 내고 떠나간다 아무도 나를 버린 적 없는데 버려진 것 같다 떨어진 나뭇잎들은 서로의 몸을 감싸고 있는데 ​ 도시락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면 배가 부른 것 같다 ​ 버려진 도시락에서는 도시락을 싸는 엄마의 뒷모습이 보인다 ​.. 2023. 5. 21.
박홍점 시인 / 장미의 연대 외 1편 박홍점 시인 / 장미의 연대 오월의 덩굴장미는 봄에게 씌우는 왕관이다 맥락 없이 끊어졌다 이어지는 문장들처럼 매혹적이다 고요이면서 한편으로 소란하다 언제나 욕망을 건드린다 꺾고 싶은 훔치고 싶은 누군가를 부르고 싶은 장미를 건네는 것은 전부를 내어 주는 것 지팡이의 손에서도 장미는 기우뚱거리며 핀다 공동의 장미를 훔치고도 노인은 뻔뻔하다 몸은 낡아도 사랑은 붉다고 주장한다 도서관 왼편 담장은 장미의 바탕이다 장미는 슬몃 책의 제목만을 훑는다 겨울눈의 대척점에는 붉은 장미가 있다 처음의 장미 언제나 유일한 눈 맞춤 뛰는 장미를 좇아 나도 뛴다 뛰는 장미가 모퉁이를 돌 때 힘껏 달린다 장미를 생각하면 이겨낼 수 있는 언덕 참을 수 있는 의자 나는 아직 알량한 일탈을 넘어서지 못한다 울타리 안에서 어둠이 날개.. 2023. 5. 21.
문충성 시인 / 바닷바람 외 2편 문충성 시인 / 바닷바람 삶이 고달프면 바닷가로 나오라 그곳이 동해거나 서해거나 남해거나 제주 바다가 아니어도 좋다 수평선은 희미하지만 짙푸르지 않아도 언제나 눈 떠 있고 상관없다 흰 구름 두어 점 거느린 파란 하늘 새파랗게 부는 파란 바람 부글부글 불타는 가슴 어루만져줄 바닷바람 한 자락만 있으면 그래 아무 바닷가에 가게 되면 그때 그대여! 말라르메에게로 도주하라 한글로 꿈꾸며 노래하라 문충성 시인 / 첫 봄비 내리는 날의 기억 꽁꽁 얼어붙었던 하늘아 참았던 울음 탁 터놓아 엉킨 실타래 풀려나가듯 내리는 솜털 같은 첫 봄비 하늘아, 조금 성급했니? 무지개도 먼 산에 걸어두고 봄바람도 먼 들판에 재워놓고 꽁꽁 얼어붙었던 땅아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거라 가슴속에 키워온 모든 슬픔의 씨앗들 죽어 살던 고통의 .. 2023. 5.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