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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14021

김현지 시인 / 꿈꾸는 흙 외 1편 김현지 시인 / 꿈꾸는 흙 -달 항아리의 꿈 빛도 어둠도 몰아낸 고행의 숯굴 속 구백, 천, 숨 막히게 타올라 연기마저 산화한 무형의 시간 차라리 황홀했습니다 뼛속에 다진 마지막 말도 한낱 불순의 무게 제 모습 버린 뒤에야 만나는 제 이름 지운 뒤에야 보이는 오, 마알간 목숨의 결정潔靜 꿈꾸는 자유만 허락하십시오. 김현지 시인 / 참 사랑은 백치 같아야 ​ ​ 그 마음속 물샐틈없는 사랑이면 온다 그 마음 명경같이 맑으면 기어이 온다 잊지 않았으면, 잊히지 않았으면 언젠가는 꼭 온다 마음밖에 사립문 열어놓고 가슴속 복사꽃 이지러질 때까지 백치처럼 아둔하게 춘향이 마음처럼 일편단심이면 온다 그래, 그래, 그 마음 천지 간에 그대로 죽어도 한마음이면 그 사랑 다시 온다 김현지 시인 1947년 경남 창원에서 출.. 2023. 2. 7.
김종목 시인 / 석류 4 외 1편 김종목 시인 / 석류 4 ​ 잘 익은 가을이 알알이 박혀 있다 바람이 지나는 아슬아슬한 길목에서 순식간 팍-! 터져버린 저 핏빛 수류탄. 김종목 시인 / 장미원에서 귀는 잠시 접어 두고 눈으로 듣는 시간 이 화려한 꽃밭에는 귀는 소용없는 것 오로지 눈으로만 듣는 색의 소리 현란하다. 눈으로 번역되는 직관의 꽃 언어에 은은한 향기로 후각을 자극한다 눈으로 해독된 언어엔 향기까지 덤이다. 김종목(金鍾穆) 시인 1938년 대구 의성 출생. 대구사범대학 본과 졸업. 197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 198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와 1983년 《현대문학》 시 천료. 시집 『인생의 향기』 외 작품집 23권이 있음. 부산동고등학교 교사. 1986. 국방부장관상 수상. 2023. 2. 7.
박가경 시인 / 정글 그리고 짐 박가경 시인 / 정글 그리고 짐 가지와 줄기는 더 어두운 곳에서 빛났다 나는 몸속에 비장한 단어들을 가득 담고서 매일 그곳에 갔다 하나씩 튀어나온 단어들이 혓바닥 안에서 다시 삼켜져야만 맹수들의 무서운 얼굴을 만나지 않았다 비굴은 어리숙함 속에서 가시를 갖는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내 뇌는 벌써 싱싱해서 아직 알맞게 영글지 않아서 내 입속의 발칙함을 꼭꼭 닫아 버려서 성장판을 온통 바닥을 향해 열어 놓는다 보이지 않는 적을 찌르며 한 칸 한 칸 올라간다 철창 속에 갇힌 한 마리의 저항처럼 꼭대기에 올라가 앉는다 그 황홀을 들키지 않으려고 소리치지 않는다 모래바람이 가벼운 방향을 택해 날아가지 않았다면 내 스커트 안쪽에서 여자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걸 잊을 뻔했다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아니 들키고.. 2023. 2. 7.
이수익 시인 / 초상화 시리즈 이수익 시인 / 초상화 시리즈 당신은 그렇다 음습한 곳을 좋아하는 선명한 자리를 기피하는 그런 당신은 축축하고 습기 찬 어두운 자리를 구애하듯 즐기는 그래서 따지고 보면 제법 위험한 요소를 품고 분쟁주의자로서의 아슬아슬한 기회를 누리고 있는 당신에게는 가득한 절망이 최고의 묘수 달아나라, 달아나라, 한참 멀리 달아나라, 격리된 공간에서 반짝 눈을 뜨는 당신은 체질적 반항아, 저주의 밤은 깊고 또한 완강하므로 혼자만이 품는 그윽한 환희여 차갑고 서러운 그대 당신의 고통이여 계간 『시산맥』 2022 겨울호 발표 이수익 시인 1942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영어교육과 졸업.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야간 열차』 『슬픔의 핵(核)』 『단순한 기쁨』 『그리고 너.. 2023. 2. 7.
강미영 시인 / 역병 외 1편 강미영 시인 / 역병 새장 속 앵무새를 길들이는 것이다 긴 팔과 짧은 팔이 계절을 잃는 것이다 우리들은 말도 안 되는 마스크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노인들은 오래전 경험한 역병의 기억을 치매와 치마의 오해로 혼돈하는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치마 속에서 치매를 감추기도 하는 것이다 늘 다니던 거리가 욱신욱신 아파오는 것이다 밤새 뜯어먹던 골목길을 빠져나오는 것이다 가늘고 긴 문장들 입 안의 세 치 혀를 꺼내는 것이다 입구를 찾지 못한 단기기억이 울음을 삼키는 것이다 -시집 『브로콜리 마음과 당신의 마음』 ​ 강미영 시인 / 비와 모과 사이 눈처럼 내려 모과를 떠올리고 먼 새로운 행성을 그려본다 모과는 모자가 아니었다 당신은 내가 될 수 없으니 내가 갈게 진실은 언제나 미궁 속으로 숨어버리고 얼굴은 모과 색으로.. 2023. 2. 7.
이현경 시인 / 모국어 물소리 외 1편 이현경 시인 / 모국어 물소리 빗소리가 기다려지는 날 싱크대의 스테인리스 판위에 떨어지는 물줄기의 난타 포도가 씻겨내려가고 복숭아 피부의 솜털이 떠내려간다 물소리를 들을 때마다 냇가 여울목 앞에 와있는 것 같다 비 오는 날에는 두 개의 물소리가 화음을 만들어 음표들이 피아노 건반에 스며든다 손가락 사이로 무성하게 젖는 소리 생의 매듭도 물에 풀어서 같이 흐를 수 있다면 물방울이 살아서 손가락에 매달린다 이런 것이 오랫동안 동거한 정이었던가 정수기에서 들려주는 색다른 낙숫물 소리 새벽, 생수가 입술을 애타게 부른다 빗방울이 잎사귀에 매달리듯 목마른 혓바닥에 얹히는 해갈 뿌리 끝이 하얀 모국어의 물소리가 찰찰 떨어진다 물소리의 장르들 이 새벽 누군가, 갈증을 지우고 있다 이현경 시인 / 그대 떠난 뒤, 바람.. 2023. 2. 7.
김미정 시인 / 얼음들 김미정 시인 / 얼음들 세상 모든 비밀은 미끄럽지 순간이 녹으면 서로를 기억할까 일상은 늘 영하 언제부턴가 쓸쓸하고 사소한 이유가 추워졌어 대화에 입김이 서리고 얼어붙은 감정이 모여들어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네 그림자들은 마주 보고 옷을 벗기고 빛을 앓는 시간이야 손가락 끝으로 빠져나가는 온기들 네가 사준 외투는 이따금 따뜻했어 그래도 장갑 낀 손안에 모두를 재울 순 없지 빙하에 올라타는 꿈이었나 헐벗은 나뭇가지가 떠다니고 금이 간 새들이 멀어져가 누군가의 뒷모습을 배경으로 알몸의 계절이 빛나고 있었다 투명하거나 검은 -반년간지 『상상인』 2022년 상반기호 발표 김미정 시인 2002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2009년 《시와 세계》 여름호 평론 당선. 시집으로 『하드와 아이스크림』(시와세계, 201.. 2023. 2. 7.
류미야 시인 / 레 미제라블 외 1편 류미야 시인 / 레 미제라블 날아든 돌멩이가 뾰족할수록 말여, 맞은 놈 설움이사 갑질 더한 벱이제 그러니 농이나 진탕 농치든지 말든지 자자, 이거나 들어 속 푸는 덴 최고니께 속 다 쎅이고 따짐 뭐혀 죄다 한통속인 걸 참말로 생각할수록 웃기는 짬뽕들이제 울 거튼 무지랭이야 안중에나 있겄어? 거 뭐냐 표 구헐 땐 지랭이같이 기더구만 그담 달 이짝 동네는 강제철거 들갔당께 넨장할, 어째 인생이 살수록 겨울인감 울 엄니 아부지는 세월 어찌 녹이셨누? 철들자 무덤 가겄네…… 억울해서 워쩌! 분탕질 쳐보든가 쌈박질 해보든가 머리 박고 대거리한들 뾰족한 수나 있간디? 자 자 자, 술이나 먹자고 피차 진탕 아니겄어? -시집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서울셀렉션, 2021. 류미야 시인 / 내 마음의 우.. 2023. 2. 7.
김영산 시인 / 우주문학과 시 외 11편 김영산 시인 / 우주문학과 시 이미 우주문학 시대에 우리는 접어들었다, 고 나는 쓴다 서울에서 한적한 시골 학교를 오가며 이 어린 새싹들이 나는 좋아 다행인 것은 38년 만에 돌아온 교실이 캄캄한 지난날의 블랙홀이 아니라는 것이다 블랙홀은 너무나 머나먼 곳에 있다 블랙홀은 빛나지 않는 가장 큰 별이라서 블랙홀은 거리를 둬야 별이 된다, 고 나는 칠판에 쓴다 우리 태양이 은하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2억 년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나는 돌고 돌아 돌아온 교실에서 나의 수업은 ‘과학과 시’ ‘우주문학은 과학이 아니어서 슬프다’ 우리 누리호 우주선이 성공하더라도, 시는 과학이 아니라서 외진 교실에서 우리는 시를 쓰고 내가 공부하던 교실의 둥근 책상에서 36명의 1학년을 만나 앳된 시를 쓰자 앳된 우주문학을 하자.. 2023. 2. 6.
김유선 시인 / 가족 외 1편 김유선 시인 / 가족 싸우지 말아라 남편은 우리에게 타이러고 나가지만 나가서는 그는 싸우고 있다.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지만 그가 현관문을 들어설 때 우리들은 안다. ​ 그의 옷을 털면 열 두번더 더 넘어졌을 바람이 뚝 뚝 눈물처럼 떨어진다. 싸우지 말아라 아침이면 남편은 안스럽게 우리를 떠나지만 그는 모른다. ​ 아이들의 가볍고 보드라운 입김이 따라가는것을 그가 싸울 때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마세요 떨고 있는 것을~ 김유선 시인 / 유년의 모래밭 유년의 모래밭 위에 낯선 새 한 마리 문득 날아와 옛날처럼 꿈을 쪼아먹고 있다 그 깊이따라 빛깔 달라지는 추억 한 움큼씩 파내면 묻혀진 시간들 우 수 수 살아나와 살갗을 간지럽힌다 이제는 아픔조차 그리움이여 얼굴 붉히던 바람 찾아서 파고 또 파들어가면 어느 길.. 2023. 2. 6.
이제야 시인 / 피아노 조율법 외 1편 이제야 시인 / 피아노 조율법 사연이 점점 깊어지는 것보다 에피소드가 매일 많아지는 것이 나아 기념일은 어김없이 돌아오니까 어떤 이야기가 기념일이 되지 못하는 것은 혼자 깊어지기만 하기 때문이래 깊이를 어기는 쪽은 더 사랑하는 사람의 버릇 어쩌면 남은 이야기들은 소리가 되기를 기다리는 소음일지 몰라 처음 겪는 일이야, 가장 쉬운 위로의 방식으로 아름다운 차이를 주자 아파도 기념일이 되자 깊은 너보다 많은 우리가 되기 위해 마치 처음처럼 한 번도 조율된 적 없지만 오늘도 피아노를 조율하자 깊은 기념보다 많은 기념을 위해 이제야 시인 / 시간과 보낸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에는 시간이 하는 일을 보았다 시간의 얼굴을 닮은 나의 의자에서 시간을 만났다 시간의 팔을 보는 일은 매일 쓰는 글자를 되감는 일 .. 2023. 2. 6.
최서진 시인 / 귀 외 1편 최서진 시인 / 귀 절벽 같은 무늬를 가진 나무는 어두운 귀처럼 말이 없다 어두운 귀가 나무의 소리를 모은다 부서지기 쉬운 인간의 시간을 보듬으면서 나무속에는 잘린 나무가 가득 들어있다 ㅡ 『시인시대』(2022, 여름호) 최서진 시인 / 홍매화, 그 붉음에 대하여 언니의 오래된 결혼식 비디오에는 죽은 할머니가 걸어다닌다 죽은 아버지가 걸어다닌다 심장이 있는 흉터의 모양으로 홍매화 송이 숨소리처럼 바스락 피어난다 지워진 손금마다 서로의 비밀이 붉어진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말을 외우다 혼자 어두워진다 화면에서는 고무풍선이 아직도 터진다 공중에 뜬 죄를 필사하듯 막다른 시간 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지는 불빛들 불빛은 환할 때가 가장 슬픈 목숨 같다 지금은 다른 방향의 밤하늘 아래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이 농담.. 2023. 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