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노 시인 / 200 광년의 사랑
많은 은하 중에 난 안드로메다를 생각하면 울게 된다. 가까운 곳에 북두칠성도 있고 오리온자리도 있고 사수자리도 있고 손에 잡힐 것 같은 별도 많은데 하필 안드로메다라니 물으면 마땅한 대답도 하지 못하면서 200광년 떨어진 곳의 안드로메다라니 하면 가슴에 재현되듯 펼쳐지는 안드로메다의 어느 거리 가스 등 푸른 안개 자욱한 밤에 안드로메다 여인이 보인다. 내 상상의 여인이 안드로메다 풀꽃 한 송이 머리에 꽂고 안드로메다의 말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것만 같아 200광년 가야만 비로소 만나는 여인이라 안드로메다 생각하면 난 울게 된다. 200광년 떨어진 사랑이라 안드로메다 생각하면 난 울게 된다. 순이도 있고 자야도 있고 난이도 있고 숙자도 블랙 로즈도 있고 나타샤도 실비아 플러스도 있고 온갖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데 하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안드로메다 여인이라니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 망상, 공상이라지만 난 언제나 안드로메다를 생각하면 울게 된다. 200광년 떨어진 내 사랑 때문에 울게 된다. 우리 생이란 기껏 백 년 남짓 별을 향해 간다는 것마저 불가한 일인데 더더욱 안드로메다라니 안드로메다의 여인이라니 이루지 못할 꿈에 미친 나를 보고 사람 버렸다니 하지만 그럴수록 더 간절해지는, 더 가고 싶어 몸부림치는 안드로메다와 안드로메다의 여인 200년 광년 떨어져 있는 내 사랑 안드로메다라 생각하면 짝 잃은 물새처럼 나는 밤새워 울게 된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강가에서 강가에 오니 비로소 내 죄의 그림자가 강물에 어린다. 그간 내 죄로 얼마나 울던 가슴 아픈 꽃이며 얼마나 슬픔으로 몸부림치던 양 같은 사람들이었던가. 풍화작용으로도 모래가 되지 않고 악몽이 되는 죄의 기둥 내가 남긴 족적은 누군가 지울 수 없는 얼룩이 되었다. 강가에 오니 비로소 나로 인해 파란만장 위로 떠가는 무수한 풀잎 같은 이름이 보인다. 여기 뿌리 내려 억겁 고목처럼 푸르러야 할 것이 나로 인해 황급히 떠나나 다시 돌려세울 수 없는 어깨 강가에 오니 비로소 풀뿌리같이 새하얗게 씻어야 할 내 죄목이 낱낱이 보이고 블랙홀 같은 강 속으로 투신이 마땅한 내 참회의 길이 보인다. 나로 인해 멀리서 숨어 물짐승같이 우는 세월이여 무변 광대한 우주에서 마음껏 말 달려야 하지만 내게 사로잡힌 맥없고 가난한 이름들이여 내 말이 쾅쾅 대못으로 가슴에 박혀 판자 같이 떠내려가는 이름이여 내 강물에 휩쓸려 몇 방울 물로 돌아가고 몇 줌 흙이 되든지 천년 울음 우는 이무기가 되었다가 드디어 승천하는 용이 되어 내 죄를 갚으려고 뼈와 혼이 뒤틀리는 용울음 울어도 될까. 먹장구름처럼 몰려오는 대재앙을 물리치고 목숨을 다하는 해룡이라도 좋은데 강가에 오니 청동거울인 수면에 어리는 삐뚤어진 내가 비로소 보인다. 도저히 나라고 할 수 없는 손가락질할 수밖에 없는 나일 수 없는 내가 환히 보인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2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궤나 정강이뼈로 만든 악기가 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 정강이뼈로 만들어서 불었다는 그 악기 그리워질 때면 그립다고 부는 궤나 그리움보다 더 깊고 길게 부는 궤나 들판의 노을을 붉게 흩어 놓는 궤나 소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짐승들을 울게 하는 소리 오늘은 거리를 가는데 종일 정강이뼈가 아파 전생에 두고 온 누가 전생에 두고 온 내 정강이뼈를 불고 있나 보다 그립다 그립다고 종일 불고 있나 보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0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그리운 아이리스
우리 낯선 곳으로 가자. 넌 나의 팜므파탈이고 꽃뱀인 것, 이미 서로 알므로 낯선 곳에 가 사랑으로 한 살림 차리자고, 기어코 네가 나를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되게 해줘. 까짓것 사랑 때문에 죽으면 후회 없어. 나의 아이리스. 태양이 이글거리는 곳에서 태양이 질투하는 태양보다 더 뜨거운 사랑, 혹한의 극지에서는 혹한을 녹이는 사랑을, 세상에 온갖 사랑의 체위가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체위로 오르가슴에 이르러 서로 죽여 달라며 목을 조여도 좋은 것, 아이리스 우리가 사랑하는 동안 세상에 비 내리겠지. 여기저기 싹이 돋고 말랐던 저수지에 물이 차오를 때 우리도 새싹이라 새로운 사랑을 발명하고, 신천지 같은 우리의 사랑, 숨겨온 점 같은 사랑을 서로의 몸에서 발견하는 거야. 가장 강력하고 수면이 긴 사랑의 건전지로 갈아 끼우는 거야. 아이리스 세상의 사랑은 너무 진부해졌고 사랑의 순수, 사랑의 열정이 식어 사랑이라면 너무 식상하게 된 것이 사실, 아이리스 우리가 한 화장이나 우리가 쓴 문장은 다 위선이었다. 가식이었다. 사랑을 생각할 땐 뼈 속까지 사랑만 생각하자고. 살을 주고 뼈를 치듯 때론 비장하게 사랑이 우리가 이르러야 할 최고의 경지인 선이야, 우리가 그간 숨겨왔던 사랑을 서로에게 보여주자고, 진짜 사랑이 뭔지. 아이리스. 그리운 아이리스, 우리 사랑으로 죽자고. 사랑하다 죽자고. 그간 치지 않았던 별점을 쳐서 낯선 곳으로 가자고. 그곳이 어떤 곳이라도 사랑은 늘 순수해. 순수에 물들면 오염이 아니라 청정지역이 되므로 아이리스, 아이리스, 그리운 아이리스 내가 너를 부르는 소리 들리기는 하나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0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나무의 파문
나무가 파닥이는 것은 바람의 힘을 빌려 나무의 말문을 연 것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과 어울려 아우성치는 나무 그 파닥이는 푸른 소리가 겨우내 침묵으로 익혀온 말이라는 것을 안다. 숲에서 폭포같이 쏟아지는 나무의 말이 소리의 강물을 이루어 끝없이 출렁대어 먼 곳으로 흘러가며 세상을 푸르게 물들이는 것을 예민하지 않는 사람도 다 아는 것이다.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세차게 파닥이는 나뭇잎 혁명의 선언서를 읽는지 파닥이는 소리 한번 크다. 나무는 바람의 힘을 빌려 끝없이 외치면서 자란다. 외치는 만큼 자라 이마의 땀을 식히라고 지친 몸 와서 쉬다 가라고 촘촘한 그늘을 짠다. 수백 년 나무의 나이테가 둥근 것은 나무의 외침이 제 몸에 만든 단단한 파문이기 때문이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3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오늘은 늦더라도 너에게로 간다
오늘은 팜므파탈이여! 너에게로 간다. 한번은 네게 철저히 부서지고 파괴되어야 하므로 지금껏 장난처럼 살아왔던 내가 네게 죽었다 살아나는 부활의 아픔을 겪어야 하기에 더럽지만 살아있는 것이 자존심만 같아서 내 죄의 노래가 세상에 들려주는 나의 무용담만 같아서 하나 그간 태연한 척을 했으나 참회의 나날이었다. 거리가 어두워 돌부리를 걷어차도 너에게로 간다. 잔업같이 매달려야 할 세상의 일은 뒤로 두고서 나를 경계해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개는 두렵지 않고 가물거리는 조등에 두 손 모아 망자의 명복을 빌어주며 오늘은 늦더라도 팜므파탈이여! 너에게로 간다. 너에게로 가서 독같이 치명적인 너의 사랑에 죽더라도 너의 그 불타는 가슴이 내 부활의 무덤인 것을 오늘 밤 아예 대놓고 너에게로 망가지려고 간다. 사정없이 나를 그대의 옴파탈로 만들어다오. 나의 단말마가 하늘에 별똥별처럼 흐르게 해다오. 오늘은 팜므파탈이여! 너에게로 갈 수밖에 없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3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나의 시집 도플갱어
돌아다니는 자, 자신의 분신, 자기의 환영이 도플갱어다. 도플갱어를 만나면 자기가 죽는 다는 암시도 되지만 자신을 사칭하는 또 다른 자신을 본다는 것은 곤혹스럽지만 놀라온 사실이다. 아무리 같더라도 다른 곳에서 떠돌았으므로 마주 앉아 무용담을 나누다가 보면 하루가 짧을 것이다. 나의 도플갱어도 지금 쯤 푸른 청바지와 청재킷을 입고 고대 도시의 오후를 늙은 개처럼 어슬렁거릴 것이다.
내가 나를 스친 적이 있다. 지하철이 비껴가는 사이에 낯선 듯이 나를 바라보는 나를 보았다. 조간을 한 손에 말아 쥐고 있는 스타일이 전혀 나와 맞지 않았지만 가볍게 목례를 보내 왔다. 내게서 떨어져간 나이거나 나로부터 떨어져 나온 더블이 내 마준 편에 선 것이었다. 어딘가에 나를 집요하게 지켜보는 내가 있다는 생각 때로는 먼 사막의 대상이 되어 푸른 달밤 터벅이며 내가 가고 있다는 생각에 내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내가 잊어버렸던 것을 또 다른 내가 가지고 있을 것도 같다. 어릴 때 쥐똥나무 Y 가지로 만든 새총 겨누었다 하면 백발백중 명중에 가깝던 손때가 묻어 반질거리던 새총, 가슴의 가졌던 순정의 이름 순이 어느 날 밤 먼 하늘을 건너오는 외로움을 못 견뎌 울부짖는 소리가 또 다른 내가 지르는 목소리란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한 때 나도 내가 너무나 외로워 벽에 머리를 짓찧는 자학으로 길고 깊은 겨울밤을 보낸 적이 있다. 나와 다른 또 다른 나이나 분명 하나의 뿌리를 가진 것이다. 인생이 이렇게 외로운 것은 잃어버린 나를 내가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려고 나는 나에게서 또 다른 나를 세상 저편으로 보냈으며 나는 나로 부터 또 다른 내가 되어 어떻게 어성초 푸른 이 밤으로 떠나왔을까. 서로가 떠나므로 반쪽의 나와 반쪽의 또 다른 나로 불완전하게 되었으므로 남은 생이란 하나의 나를 위해 잃어버린 원형의 복구를 위해 떠도는 것 나는 또 다른 나와 수시로 교감을 나누는 것이다. 내가 울적 할 때 또 다른 나도 울적 한 것이다. 분리될 수 없는 감정의 끈을 본능처럼 흔들어 대므로 나와 또 다른 나와 감정의 합일점에 이른다. 내가 또 다른 나를 떠나왔으므로 껍질인 듯 남은 또 다른 내 안으로 귀환하는 꽃 피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합체에 이르러 비로소 별을 향해 발돋움하거나 감자 꽃 필 때 비로소 하나가 된 우리가 도시 외곽으로 야유회도 갈 것이다. 지금은 다만 씨감자 같은 꿈을 가슴에 묻고 움츠려야 할 때 내 그리움만 나무처럼 일어서서 또 다른 나에게 끝없이 푸른 텔레파시를 보내는 것이다.
월간 『시와 표현』 2018년 3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내 고향 영일(포항)
아직도 모래 언덕에 막소금 같은 별이 뜰 걸 신비한 산 갈치 물가에 밀려나 은빛 지느러미 퍼덕일 가을 바닷가 고구마 알이 굵어 가면 바다에 드나들며 조개 잡던 아이들 불알도 위로 착 올라붙어 제법 굵어져서 담벼락에 누구와 누가 뭐, 뭐 했다는 낙서를 하고 글자를 깨우친 아이가 낙서 앞에 서서 뭐, 뭐가 뭐야 하면 너도 어른이 되면 뭐, 뭐를 알게 될 거야 하면 뭐, 뭐가 좋은 거야. 나도 빨리 어른이 돼야지 하다가 그런데 어른이 뭐야 하며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는 사이 푸른 파도소리가 끼어들고 갈매기가 울고 해국이 피고 아직도 고향 바닷가에 아이들이 뛰놀고 수평선을 넘어가는 배를 바라보며 먼 나라를 꿈꾸고 짜디짠 바닷물에 담근 불알이 단단히 여물어 가고 소녀들은 바닷바람에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끝없이 피어나는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먼 바다로 진주 조개잡이 떠나는 처녀가 되기를 꿈꿀까. 칠월이면 청포도가 알알이 익어가는 내 고향 연오랑과 세오녀의 설화가 파도 끝에 물보라로 피어나면 망망대해로 고래잡이 떠나고픈 내 꿈 일렁이는 물미역 사이에서 해마로 울 텐데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1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네가 나의 봄이다
오너라, 네가 나의 봄이다. 네 발소리에 싹 트는 쑥이고 네 웃음소리에 멀리서 날아오는 제비다. 네가 와야 우리 울력으로 진흙을 이겨 오두막집 짓고 뒤란에 텃밭 가꿔 너랑 나랑 먹고 앞집 뒷집에도 나눌 수 있다. 텃밭에 무꽃 피면 벌 나비 잔치 날이다. 꽃소식 곱게 접어 언 강물에 던지면 해빙기가 온다. 그간 너는 아득한 구름 밖의 사람,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 들려주지 않던 사람, 어디로 향하는지 방향도 몰랐으나 가면 어디로 가느냐. 네가 오면 울려고 울음보에 꾹꾹 쟁긴 경칩이 뜨거운 울음을 아느냐. 엄동을 드릴처럼 파고들어 봄 꿈을 철철 끌어올린 이 땅의 풀뿌리를 아느냐. 뿌리가 들뜨지 말라고 보리밭을 자근자근 밟은 달빛을 아느냐. 나의 봄인 네가 오기를 기다려 마중 나간 별은 별이 아니라 너의 길을 밝히려는 조상의 혼불이다. 누대의 사랑이다. 그런데도 오지 말아야 할 이유 와야 할 이유보다 더 많은가. 오너라, 나의 봄인 너야. 네가 와야 묵정밭 깊이 쟁기질할 겨우내 신전같이 단단해진 내 장딴지다. 다시 물꼬를 트고 가득 채워야 할 무논이다. 네가 온다기에 나의 겨울은 따뜻했다. 단전 단수가 된 세월도 너를 부르며 견뎠다. 네가 와야 언덕의 보리밭이 바람에 물결치고 종달새 날아오르고 벽오동에 돋아나는 잎이 봉황을 부르기 시작한다. 네가 와야 각설이도 품바 타령하며 아리랑 고개 넘어오고 태몽 깊어가는 마을에 북두가 튼튼한 아이를 점지하는 날이다. 동편제 서편제 가락가락이 심금을 울린다. 살다 보니 흉허물이 왜 없겠는가. 그간의 일 고하면 눈물 날 테지만 네가 나의 봄이다. 네가 나의 꽃이다. 네가 나의 꿈이다. 버럭버럭 소리 지르는 세월에 오는 봄도 되돌아가지만 모진 삶이 모진 힘이 되어 너를 데려오고야 말 것을 그리해 이룬 꽃 대궐 새 동네에서 함께 뒹굴며 신나게 살아 보자. 네가 내게 와야 세상에 봄이 시작된다. 네가 나의 봄이다.
-웹진 『시인광장』 2025년 2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네바강 편지
네바강물로 흘러버린 너에게 눈물의 편지를 쓴다. 너 없는 네바강에 하나둘 피어나는 장미는 혈액형이란 네 노래를 머금고 피는 반전의 꽃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강철의 붉은 장미 가시 돋친 장미로 끝없이 피어난다. 허공으로 신호탄처럼 탕탕탕 피어난다. 빅토르 최 오로라 같은 네가 남긴 불멸의 노래 네바강물로 넓게 펼쳐져 끝없이 출렁이다가 메마른 가슴 기슭까지 밀려 와 적신다. 누구나 한 시대를 살고 간다지만 한 시대를 살다 간 네 족적(足跡)마다 윤슬처럼 일어나는 꿈인 줄 안다. 역린 같은 꿈인 줄 안다. 빅토르 최 한때 활화산처럼 터져 오른 강한 비트의 네 노래는 잠든 의식을 잠든 세계를 새벽 꽃처럼 깨어나게 했다. 빅토르 최 네바강물로 네가 흘러갔지만 누구도 네바강물로 너를 흘려보내지 않았기에 짝 잃은 물새처럼 울며 편지를 쓴다. 한 초롱 잉크 같은 내 목숨에 담근 펜으로 편지를 쓰듯 편지를 쓴다. 빅토르 최 너를 기다리는 마음은 오늘도 네바강보다 깊고 넓고 붉은 노을이 번져오는 네바강에서 일제히 내 그리움도 발롱, 발롱하며 끝없이 불타오른다.
*네바강은 러시아에 흐르는 강이고 빅토르 최는 할아버지가 한국인이다. 키노라는 록밴드 리드로 비틀즈 같은 영향력으로 소련과 유럽을 흔들었다. 혈액형이란 반전의 노래도 했으나 의문의 교통사고로 28살에 요절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7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노마드의 노래 그대여, 가슴 아픈 말이지만 다시 뿌리 내리지 못하리 한번 뿌리 뽑히므로 곳집 앞 망초꽃으로도 피지 못하리 천년 서까래를 칭칭 감고 우는 능구렁이 울음에 젖더라도 담장에 올라 하얗게 핀 박꽃도 되지 못하리 한 번 뿌리 뽑히므로 누구나 어머니 눈물 안에서 위태위태하게 표류하는 난민 밥 먹으라고 나를 찾아다니다가 끝내 강아지풀 언덕에 올라 고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던 누이의 나폴나폴 대던 물방울무늬 원피스 곁에 달개비꽃으로도 피지 못하리 금촌댁 뒤란의 커다란 먹감나무에 등처럼 켜진 홍씨에 대하여 끝내 따지 않고 까치밥으로 둔 금촌댁 할머니의 사랑에 대해 밤새 도란거리는 담 밖으로 고개 내민 앵두나무도 되지 못하리 왕방울만 한 별이 뜨는 광야에서 초인을 기다리며 한 무리 양과 떠돌며 사나운 늑대를 향해 물맷돌을 던지지도 못하고 한번 현실에서 뿌리 뽑히므로 몽환 같은 나날, 불구의 나날 잡히지 않는 콘도로의 날개, 잡히지 않는 일상의 꿈이여 뿌리란 푸른 항구에 내린 정박의 닻 같기에 해국같이 바람의 노래 바다의 노래 고래의 노래 해마의 노래 작은 입으로도 따라 하지 못하리 내게 처음으로 뿌리에 대해 말씀해주신 역사 선생님이 가진 대나무 뿌리로 만든 회초리가 그리운데 한번 뿌리 뽑히므로 다시는 가질 수 없는 뿌리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날 선 잎으로 수천수만 근 태풍의 각을 뜨던 풀들의 저항에 대하여 생명력에 대하여 피로 뭉친 그들의 울력에 대하여 늘 부러워하기만 할 뿐 나는 한 번도 풀의 편도 되지 못하고 우황 들어 우엉우엉 울면서라도 거친 세월을 뜯어먹고 끝없이 되새김질하는 황소 한 마리도 되지 못하리 속성수 은사시나무처럼 자라 고향을 향해 우듬지에 까치를 앉히고 바람에 천천이 나부끼지도 못하리 그대여, 가슴 아프지만 이제 고백하는데 다시 뿌리 내리지 못하리 흐르는 구름을 따라가도 흐르는 강물을 따라 하류를 가도 고향 뜸 들이는 밥 냄새 구수한 고향인데 뿌리내리지 못하므로 잃어버린 방향감각과 맥 풀린 청춘이라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내가 떠돈다 해도 어둠의 영토를 벗어나지 못하는 맴돌이 내가 떠도니 함께 떠도는 내 밤하늘을 수놓던 별이여, 은하수여 개 짖는 밤을 곱게 수놓던 뚝뚝 지는 목련이여 가슴에 불길을 일으키던 경칩이 뜨거운 울음이여 내가 떠도니 함께 떠도는 자전과 공전을 잃어버린 꿈이여 나는 자생적일 수밖에 없었으나 누구나 손가락질하는 노마드 끝내 버릴 수 없는 현대판 유목민이라는 슬픈 상징이여 한 번 뿌리 뽑히므로 누구나 어머니가 떠 놓은 정화수 안에서 침몰할 듯 말 듯 표류하는 눈물의 난민이여 그러나 잘살아보려고 몸부림치며 깨진 입술로 늦게 부르는 노래 수몰민 같으나 끝내 부력이 되는 노마드의 노래여 저 짙푸른 하늘 아래로 험한 행보이나 놓치지 않는 노마드 노래의 음정과 박자여 그대에게 가슴 아픈 말, 다시 뿌리 내리지 못하지만 홀로 눈물 글썽이며 노래하다 보면 이 또한 지나가는 한순간의 노마드이기를 -웹진 『시인광장』 2024년 8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뒤란의 희망에 대해 말하다
뒤란에 두어 송이 핀 양귀비꽃이 꿈 같을 때 저벅거리는 발소리로 대밭을 내려와 뒤란으로 찾아오던 허기진 파르티잔 같은 저녁별 무리가 있기에 뒤란의 감나무 가지 사이로 조등 같은 별이 반짝이는 것이다. 마당에 매어둔 소 잔 등으로 쏟아진 별빛이 무겁다며 가만히 주저앉은 소가 밤새 거친 세월을 되새김질하는 소리 겨우내 밤 부엉이가 앉았던 가지에 앉은 소쩍새 울음 그리움을 부채질하면 나는 등을 잔뜩 부풀려 독사에게 겁을 주던 뒤란에서 본 두꺼비같이 눈을 껌뻑인다. 도둑질하러 우리 집 뒤란에 들어와 밤을 기다리던 도둑을 미리 알고 쌀 뒤주를 열어두라던 어머니 마음 오늘도 뒤란 처마에 씨 마늘 한 접으로 걸려있다.
-웹진 『시인광장』 2025년 1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매화 향기 만건곤한 날에
배가 불러도 마음이 허기진다는 말이 있지요. 어머니는 마음이 허기진다는 말은 누군가 보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 현기증처럼 일어나는 그리움이라고 했습니다.
허기가 바람이 불면 이는 메밀꽃 같은 게 아니라 허기진다는 말에 한때 나는 미로에 갇힌 것같이 혼란스러웠습니다. 허기가 무엇과 싸워서 진다는 것인지 포만인데 마음이 허기지는 것은 또 무슨 뜻인지 어머니 말씀을 듣고야 마음의 허기가 그리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끝없이 마음에 허기가 진다는 것은 끝없는 그리움이란 뜻입니다. 마음의 허기가 사라졌다는 것은 더 이상 그리움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머니 사람이 살아가며 끝없이 마음이 허기질 수밖에 없다는 말씀 그리움이 첩첩 쌓여가는 말로 이제 이해합니다.
나 그대를 생각할 때 마음이 허기진 적 많았지요. 마음이 허기지면 꽃으로 눈요기를 실컷 하며 허기를 달래면 된다고 하셨으나 꽃을 본다고 한들 그리움이 수그러들기야 하겠습니까.
허기진다고 해 무턱대고 그대에게 달려갈 수도 없는 현실이지요. 매화꽃 만발하니 허기가 만발한듯해 더 허기가 집니다. 더 그리워집니다. 매화꽃 지더라도 매실 같이 알알이 맺혀갈 그리움입니다. 마음의 허기로 죽을지 몰라 뚝뚝 지는 매화꽃을 보며 미리 별사를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5년 3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몽중인(夢中人) 그리고 몽중애(夢中愛)
기억나지 않나요. 일차 편도로 간 꿈속에서 누가 허락해줘 당신을 만난 것, 나는 몽중인(夢中人) 당신도 몽중인(夢中人) 그리고 몽중애(夢中愛), 쉽게 말하면 꿈속의 사랑 잊지는 않았을 테지요.
세상에나 그렇게 신라 천년 하늘같이 곱던 옥빛 하늘, 에밀레종소리 같이 은은하게 하늘 변죽에서 들려오던 우레소리, 쥐똥나무꽃 알싸한 향기가 당신의 옷고름을 푸는 내 손끝에 묻어나고 당신이 가슴에 품었던 은장도를 내려놓았던 봉놋방의 질화로에서 잠든 불씨가 하나둘 깨어날 때 사랑을 재촉하며 자작나무 판을 박차고 나온 천마가 하늘을 달리던 말발굽 소리, 마음껏 나부끼던 하얀 천마의 신령스러웠던 갈기, 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꿈속에서 만난 당신, 천남성 꽃대같이 고개를 들던 내 마음을 쓰다듬어주던 바람같이 부드러웠던 당신의 손길, 내가 모든 어둠을 빨아들이며 타오르는 황초불 같았던 신화의 시간
잠에서 깨고 나니 안타까운 꿈속의 사랑으로 남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는지 당신 알기는 하나요. 그런 일이 내게만 있었다고 해도 내 생의 빅뱅이고 내 생의 화양연화였어요. 비현실인 꿈이 현실의 나를 이끌어가는 힘이 되었는데 그 중심에 당신이 있다는 것을 알기는 하나요. 몽중애(夢中愛), 꿈속의 그 사랑 알기는 하나요. 당신은 모르지만 당신이 내게 왔다 간 꿈속의 사건을 알기는 하나요. 현실과 비현실로 나누는 생에서 내가 비현실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당신을 만난 꿈 때문인 것
당신과 내가 장만했던 꿈속의 살림살이, 꿈속의 텃밭에서 자라던 옥수수와 깻잎과 고추와 가지, 꿈속에서 꿈 밖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던 당신이 뒷물하는 부끄러운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당신이 가진 사랑의 중력이 얼마나 큰지 맥없이 블랙홀 같은 당신에게 빨려들던 아찔한 순간들, 당신 꿈속에서 얼마나 불가사의한 존재였는지 알기나 하나요. 내가 그렇게 꿈꿔왔던 가스 등 푸르고 젖빛 안개 흐르는 안드로메다의 거리에서 데이트를 당신으로 인해 실감했다는 것을, 꿈속에서 기적이 너무 흔하다는 것을, 차가운 불이 있고 뜨거운 얼음이 있는 것처럼 나의 이념은 무디었으나 당신의 이념은 시퍼렇게 날이 서 빛났던 것도
내가 벗어나지 않는 기면증도 결국은 당신을 만나기 위한 안달, 꾸벅꾸벅 조는 내 그리움도 일상도 다시 일차 편도로 간 꿈속에서 누가 허락해줘 당신을 또 만나는 것, 나는 몽중인(夢中人) 당신도 몽중인(夢中人) 그리고 몽중애(夢中愛), 쉽게 말하면 꿈속의 사랑을 다시 하고 싶다는 숨길 수 없는 마음이지요. 잠에 중독되어 당신을 앓는다는 소문이 언젠가 꿈속으로 당신을 불러들이겠지요.
-웹진 『시인광장』 2024년 6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물의 카마수트라 한 권
강가에 가서 혼자 있어 봐라. 슬그머니 가슴에 안겨 오는 강물의 머리카락 냄새 비릿하고 싱싱해 좋다. 아무도 보는 이 없어 강물의 옷고름을 풀고 모래톱에 누이면 감창에 물들어 열릴 옥빛 천년 하늘 나는 강물과 사랑을 나누는 푸른 장딴지의 포세이돈 수심과 폭을 알 수 없는 모르는 강물과 사랑에 빠져 세상 밖으로 한참 흘러가도 후회 없다. 윤슬 이는 몸으로 강물은 오늘도 나를 오빠, 오빠 오라고 애절히 부른다. 밤이라도 쏟아지는 잠을 뿌리치며 강가에 가면 밤이어도 강은 별이 수놓는 사랑의 경전 한 권 한 권 물의 카마수트라 나는 강물의 체위를 익혀 강물에 빠져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더라도 강물을 사랑하리라 그동안 강물과 사랑을 꿈꾸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 지독한 결벽증으로 피해 왔던 강물 내 핏줄을 타고 내게 유전되어 와야 할 강물 내 몸이 강물처럼 투명이 되어가는 그런 일생일대의 강물과의 사랑을 꿈꾸는데 아득한 곳으로 출렁이며 저물어가는 저 강물 내 사랑이라 소리쳐 부르고 싶은
-웹진 『시인광장』 2024년 5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블랙홀에서 어떻게 이 도시가 그에게 블랙홀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가 블랙홀 입구를 잡고 빨려들지 않으려 안간힘 쓰다가 성한 이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안다.
세월이 갈수록 가공할만한 흡입력을 가지는 도시이기에 하루를 견딘 만큼 급속도로 늙어버린 그가 허적허적 걸어간다.
선별적으로 힘을 가하는지 유독 그에게 집중되는 블랙홀의 힘
저러다가 아아 하며 단숨에 사라질지도 몰라 앞날을 예견한 그가 미리 유서를 쓰는 밤인지도 모른다. 도시가 블랙홀이란 것은 오로지 그를 제거하기 위한 수단이고 그는 오래전부터 살생부에 올라 있으므로 디데이만 남았을 수도
그가 늦게 거리를 어슬렁거릴 때 그를 뒤에서 집요하게 미행하던 자들이 블랙홀의 끄나풀이었는지도 모른다. 촉이 좋은 그가 불길한 예감으로 갑자기 불빛 밝은 광장으로 만약 나오지 않았다면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저항도 없이 아아 사라질 수도 있었던 일
해마다 하나 둘 종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블랙홀인 이 도시의 횡포일 수 있고 순간적으로 어둠에 빨려 드는 사람을 붙잡으려던 기억이 누구에게나 한 두 번은 있다.
아직은 육안으로 구분될 수 없으나 짜부라져 가는 그인 것을 아무리 생각해도 그일 것이라고 내세운 사람이 실은 나일 수 있다. -계간 『포엠포엠』 2023년 가을호 발표
김왕노 시인 / 부후
결국 나무는 쓰러지고 벌레가 갉아먹고 날개를 얻은 나비가 풍뎅이가 우우 날아오르고 부후의 시간이 와 버섯이 돋으리라.
모든 것에 걸었던 안간힘이 불가항력 불가능에 이르러 한 쪽으로 기우는 세상의 모든 것들, 나무들, 이정표들 그래도 부후의 시간이 찾아오고 썩어도 끝내 죽지 않은 정신이 버섯으로 돋아나 푸른 숲을 이루리라.
기꺼이 썩어야 하는 것은 썩어서 버섯으로 돋아나 숲 가득 포자를 끝없이 휘날리는 날이 삶의 절정이고 화양연화라 하더라도 세상에게 자신에게 전혀 부끄럽지 않으리라.
강대나무처럼 죽어도 기세가 꺾이지 않고 직립을 고집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어 우리 여기저기 끝내 쓰러지지만 버섯도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 부후의 시간을 부둥켜안고 버섯이 불끈 불끈 돋는 숲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리라. 계간 『포엠포엠』 2023년 가을호 발표
김왕노 시인 / 뿌리
시퍼렇게 날선 작두 크고 든든한 뿌리, 등으로 있는 작두 등 작두날은 작두 등을 잡고 세우는 것이다.
칼날은 칼등을 잡고 세우는 것이다. 아니 칼날을 시퍼렇게 키우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칼날이 할 수 없는 일은 칼등이 나서서 살아 퍼덕이는 횟감의 머리를 툭툭 쳐주는 것이다.
저 가파른 능선 강대나무도 죽창 같이 제 가지 하나 꼬나들고 어둠에게 대들려고 마른 뿌리로 버티고 바람에 제 가지를 예각으로 밤새 세우는 것이다. 아니 키우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야 밤새 삐걱거릴 리 없는 것이다.
나도 칼등인 아버지가 세상을 향해 세운 칼날 아버지가 나를 키워내므로 나는 녹슬지도 무르지도 않는 칼날 더러운 세월 깊이 파고들어 뼈까지 치려는 칼날
오늘도 내가 시퍼렇게 빛나는 것은 뿌리고 칼등인 아버지가 든든하기 때문이다.
-계간 『애지』 2023년 여름호 발표
김왕노 시인 / 담쟁이넝쿨에게 배우는 사랑
난 담쟁이넝쿨에게 사랑을 배우네. 거침없이 사랑을 찾아 온몸 오그라들 것 같은 태양 곁으로 생장점의 분열과 분열로 무거운 사랑의 꿈을 천형처럼 매달고 끝없이 오르는 것을 능숙한 클라이머 같이 담을 기어오르는 것을 그러나 담쟁이사랑은 얼마나 멀기에 푸르름으로 끝없이 타오르고 벽에 사랑한다는 문신을 철사 같이 넝쿨로 새겨놓고 얼음장 쩡쩡 깨지는 소리 말 달려오는 겨울 초입을 기다리는가. 그러므로 담쟁이넝쿨의 사랑을 더더욱 깊이 배울 수밖에 없고 하여 사랑은 또한 얼마나 깊은 뿌리를 가져야 하는가.
『메타문학』 2023년 창간호 발표
김왕노 시인 / 사랑, 그 무심함에 대하여 사랑하다 보니 사랑보다 더 무심한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기 전에 함께 보며 꿈을 키웠던 별은 이제 안중에 없습니다. 사랑하기 전에 함께 길렀던 채송화며 소국이며 까마득하게 깊은 우물에 두레박 내려 길어 올렸던 백년 우물물도 백년 우물물을 정화수로 떠 놓고 백년 사랑을 하자고 맹세한 약속도 백년수복이란 원앙침을 베고 백년사랑을 하자던 뜨거운 속삭임도 막상 사랑을 하니 말짱 도루묵입니다. 사랑을 하기 전 꿈꾸던 사랑은 사랑하니 타성에 젖어 시큰둥할 뿐입니다. 사랑하기 전에 그렇게 학수고대했던 사랑이 우리에게 왔을 때 천하를 다 얻은 듯 기뻤으나 그 기쁨,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끈을 놓아버린 듯 사랑이 그렇게 느슨한 줄 몰랐습니다. 사랑이란 올가미가 서로를 묶었을 뿐 사랑이란 반경은 저 푸른 하늘 아래로 바람에 메밀꽃 이는 언덕으로 푸른 은하수 흐르는 곳으로 넓혀지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다 보니 사랑보다 더 무심한 게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하나 다시 사랑의 불씨를 살리는 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하기 전에 그렇게 풀잎 같은 입술로 속삭였던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가 사랑이 무심한 지금이 절호의 찬스입니다. 그간 팽개쳐둔 사랑을 돌아보며 손을 잡아줄 때입니다. 가슴에서 파내고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사랑이라 누구나 가진 사랑의 화수분이라 사랑이 이렇게 무심해 상처 입을 때 다시 사랑이 백년손님처럼 옵니다. 백년에서 더 백년으로 이어가려고 사랑이 옵니다. 오늘이 사랑하기 전 다정한 눈빛으로 말했듯 조용히 사랑한다고 말할 때입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9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사랑별 -늙은 사랑에게- 1 이제 불 같은 사랑을 꿈꾸지 않겠다. 늙은 사랑아 상처를 보고 울고불고 하며 사랑은 이래야만 한다고 내세우지도 않겠다. 조용히 연고를 발라주거나 상처를 어루만져 줄뿐 가지런한 옥수수를 보며 내 것이라기보다 당신 것이라 고집하며 상할 때까지 그대로 두지 않겠다. 옛날처럼 기다린다고 먼 길 끝에서 석죽화처럼 피어 바람에 홀로 나부끼지 않겠다.
별빛이 첫눈처럼 소복이 창가에 쌓여가는 밤 당신을 넓고 주름진 등을 긁어주며 미쳐 산란하듯 청춘의 지느러미가 너덜거리도록 사랑했던 때를 이제 그리워하지 않겠다. 한 때 혼인 색을 띈 연어가 모천을 찾듯 뜨거운 사랑의 보금자리를 찾아 가는 여정이 있었지만
사랑은 불변이고 미래나 과거 현재가 없고 언제나 익어갈 뿐이라 했지만 생명이 있는 사랑이기에 사랑은 태어나고 살아가고 늙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므로 늙었으므로 힘없으나 나직한 목소리, 따뜻한 눈빛으로 부른다 해서 사랑이 아니겠느냐 내 이념에 동의하라며 함께 이념서적을 읽자던 낯선 밤은 이제 오지 않아 아쉽지만 늙은 사랑아
이제 나 떠난 빈자리에 홀로 남아 나를 기다리며 그립다고 빨리 돌아오라 하지 않으나 늙은 사랑아, 섬섬옥수로 심은 꽃이 피었다 질 때마다 갈무리하는 분꽃 씨앗이 우리 사랑의 증표인 것을 하늘을 솥 삼아 내가좋아하는 별수제비 쒀놓겠다는 꿈도 늙어갔지만 날마다 별이 초롱초롱 빛나듯 우리 꿈은 빛난다.
2 늙은 사랑아, 사랑은 늙어가지만 멸종되는 동식물이 아닌 것 잘린 고목에서 새싹이 돋듯 사랑아, 늙어가더라도 사랑을 하면 황무지 같고 끝물이 온 날 같아도 새벽이 오고 새싹이 돋는다고 믿자. 사랑의 기적이란 사랑이 그 무엇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사랑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연대기가 기적이다.
사랑아, 늙은 사랑아, 사랑은 이벤트도 아니고 게임도 아니지만 전쟁 같은 사랑도 있고 목숨을 건 사랑도 있다는데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사랑을 쟁취하는 방법일 뿐 사랑으로 만든 배가 있고 사랑으로 만든 우주선이 있고 사랑으로 기른 수천수만 평에 물결치는 보리밭이 있고 사랑으로 기른 카나리아의 울음은 아름다워 메이드 인 사랑이란 제품은 우아하고 아름답고 강할 수밖에 없다.
사랑아, 늙은 사랑아, 늙었다고 생각되는 날은 기차를 타고 가스등 푸른 밤이 있는 동해로 가든지 이난영의 노래가 바다 위에 메아리치는 목포로 가든지 순풍 타는 배를 타고 갈라파고스군도로 이어도로 케이프타운으로 지중해로 가든지 가서 닻을 내리면 굽었던 허리가 꼿꼿이 펴지고 푸른 꿈이 주렁주렁 열린다.
사랑이 늙어가더라도 간헐적으로 화산이 폭발하듯 우리 감정도 터져 오르고 망설임 없이 옛날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가 서로 사랑하러 온 것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지구의 나날은 지구의 종말이 올 때까지 사랑의 나날이라고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 사랑이고 가장 어려운 일이 사랑이란 말이 떠돌아도 오로지 세상은 사랑뿐이다.
3 사랑아, 늙어가는 사랑아 사랑이 늙어가더라도 사랑의 유효기간은 없다. 공소시효도 없다. 사랑이란 번지수는 불변이다. 개념 없는 광장, 개념 없는 관공서, 개념 없는 중앙 개념 없는 당국, 개념 없는 가로수, 개념이 없는 정책 속에서도 사랑아. 내 늙은 사랑아. 늙어가도 사랑의 노선은 불변이다. 늙은 사랑의 노래, 늙은 사랑의 꿈, 늙은 사랑의 낭만아 늙은 사랑의 포구야, 강물아, 늙은 사랑의 자작나무야, 사랑은 간다.
빵을 굽는 늙은 사랑의 밤에 멀리고 떠나는 기차소리, 백학을 휘파람으로 부는 소리, 별이 익어가는 소리 속에 충격을 가하지 않아도 없이 분열을 거듭하는 사랑의 세포 한번 태운 담배꽁초처럼 길바닥에 툭 던져버릴 사랑 같지만 어느 세기에도 사랑은 울었으나 조용히 늙어가는 사랑도 있었지만 사랑을 빙자해 꿈을 갈취하는 것은 사랑에 대한 모독이자 죄악이다. 하여 한번 온 사랑은 제발 떠나지 말기를, 사랑아, 늙은 사랑아
4 수목에 사시사철이 있으나 사랑에 사시사철이 없다. 언제나 사랑은 끝이 없는 한철이다. 사랑에게는 생로병사가 없고 오로지 생로만 있다 하자, 늙은 사랑아 사랑을 백년사랑, 천년사랑, 불멸의 사랑이라지만 사랑은 무거우나 가벼우나 통 틀어 무한 사랑이라 하자. 인류가 끝나고 지구가 끝나더라도 사랑은 남아 우주의 불씨가 된다 하자. 어떤 시간에도 구애받지 않는 것이 사랑이고 사랑은 죽음도 시간도 다 초월하는 것이라 생각하자. 다만 사랑은 늙어갈 뿐 끝나지 않는 사랑이라 하자.
늙은 사랑아, 밤새 넘칠 듯 만수위로 차올라 출렁거리는 저 물소리 우리 사랑에게 보내는 갈채라 하자. 별이 익어가는 소리 저 호랑가시나무 이파리가 파닥이는 것도 갈채라고 하자. 오늘 밤 나는 객잔의 창에 달빛으로 그림자를 새기며 철철철 우는 인중이 긴 북방여치 같은 얼굴로 늙어가는 사랑을 생각한다. 늙은 사랑을 위한 시 한편을 생각한다. 푸른 횃대에 오른 닭이 홰를 치는 새벽이 아니지만 우리의 사랑은 샛강에 피어오르는 안개 같은 사랑 늙어가기에 더 사랑스러운 사랑이다. 늙어가는 사랑아
5 우주에서 유일하게 사랑이 있는 곳, 사랑이란 말이 꽃 피는 곳 나는 지구라 부르고 사랑별이라 적는다. 약하면 없다하고 강하면 폭력이라 오해도 받는 사랑이지만 나는 지구를 사랑이 사는 가장 아름다운 행성이라고도 부른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7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사막 과수원
사막 과수원에 가보셨습니까. 사막 과수원이라 지은 이유는 사막에도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리라는 기원입니다. 사막 같은 도시 곁에 사막 과수원이 있습니다. 사막 과수원 울타리 곁의 커다란 미루나무에 둥지를 튼 까치가 나팔수처럼 짖어대는 새벽이면 기상나팔에 일어나듯 일어나고 저녁에는 취침나팔인 듯 일찍 잠드는 금실 좋은 부부가 사막 과수원에 삽니다. 그들이 키운 사과도 부부를 닮아 해맑고 속이 꽉 차고 당도가 높습니다. 적당한 먹거리가 사라진 때 베어 물면 입안을 풍부한 과즙으로 채워주는 사막 과수원이 우리 몇 십리 안짝에 있습니다.
사막 과수원에 가보셨습니까. 내 가슴이 사막 중에도 사막같이 메말랐을 때 사막 과수원으로 갑니다. 한 알 사과만 베어 물어도 내 안에 홍수지 듯 갈증이 삭 달아나므로 징검다리를 건너 숲길을 지나 아직도 있는 곳집 앞을 지나 여름이라 푸른 사과를 생각할 때마다 입 안에 고이는 침을 삼키며 사막 과수원으로 갑니다. 찾아가면 단골이라 내주는 사과는 사과이기 전에 사막을 적시는 커다란 빗방울이기를 바라는 것은 나도 사막에 무수히 사과꽃 피고 벌 나비가 날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사막에 물별이 뜨고 초원이 펼쳐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사막 과수원에 가보셨습니까. 겨울이어도 찾아가면 후숙 잘 된 사과를 내주는 곳, 세상이 사막이라 느낄 때 사막 과수원으로 낙타처럼 가면 사막 과수원이 푸른 오아시스인 것을 금방 알아차릴 것입니다. 과수원 옆에서 끝없이 샘솟는 물도 좋지만 금실 좋은 부부가 봄이면 부지런한 전지로 적뢰로 적화로 사막 과수원은 어느 집보다 품질 좋은 사과가 열리는 오아시스라는 것을 압니다. 사막 과수원이라 해 수많은 낙과를 나뒹굴게 하는 태풍이 왜 물아치지 않았습니까. 해갈이 하는 사과나무가 왜 없겠습니까. 하나 모든 것을 자연의 뜻에 맡기며 사막 과수원을 가꾸는 금실 좋은 부부가 있기에 그렇게 가꾸기 힘들다는 사막 과수원이 사막 같은 도시 곁에 오늘도 주렁주렁 푸른 사과를 매달고 있습니다.
-계간 『아토포스』 2024년 겨울호 발표
김왕노 시인 / 꽃들의 공중묘지
이 땅의 허공은 생 꽃이 죽은 비린내가 진동한다. 뭉게구름처럼 피어나 흐른다. 화무십일홍이라는데 십 일도 되기 전 바람에 짓밟히고 학살된 억울한 꽃들의 아비규환이 휩쓸고 간 후 함구령에 코 막고 귀 막은 꽃 위로 죽은 꽃의 살 비린내 진혼곡처럼 흐른다. 오늘도 바람에 유린되어 분분히 휘날리다 아득한 허공 속으로 흩어져가는 저곳은 꽃들의 공중묘지다. 가끔 꽃의 비석이듯 일어섰다 순간 사라지는 번개로 더 슬픔이 극에 달하는 저 허공은 세상에 아름다움을 보여준 게 죄라는 듯 처형된 꽃들이 묻힌 곳, 지상은 무연고자 꽃이 낭자하게 진 무연고자의 묘지, 내 슬픔은 꽃들의 공중묘지와 꽃들의 무연고자 묘지 사이에서 진자처럼 천천히 흔들리고 있다.
-계간 『아토포스』 2024년겨울호 발표
김왕노 시인 / 산신령, 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날렵하고 신출귀몰한 범이었다. 할아버지는 달 밝은 밤이면 백두대간을 타고 오르내리며 세상에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를 통째로 우둑우둑 씹으며 왜놈순사의 머리통을 앞발로 내려쳐 절명시킨 범이었다. 범 내려온다, 범 내려온다는 주문이 없어도 한 눈에 세상을 다 훑어보고 사람의 흉중도 한 눈에 척 읽어내며 등잔 같은 눈에 불을 켜고 산에서 어슬렁어슬렁 내려오던 범이었다. 북벌하고 왜를 수장시키라는 불호령을 내리며 부르르 떨던 수염 서슬 퍼런 얼굴로 위엄을 자랑하며 이 땅을 지키던 할아버지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어도 지나가는 까마귀야, 재잘거리는 참새들아 다 모여라며 술판 벌이던 호랑이 새끼도 범 꼬리도 되지 못한 종이호랑이도 되지 못한 호인중의 호인이던 아버지 산중호걸이어야 마땅한 아버지, 인걸이 없는 세상에 인걸이어야 마땅한 아버지, 산신령이 사라진 세상에 산신령이 되어야 마땅할 아버지 세상일은 안중에 없다는 듯 난봉가 부르던 파락호 하지만 죽음을 불사하고 북진가 부르며 압록강까지 갔던 아버지 끝내 백두대간을 타고 천상으로 가던 할아버지 소리, 산이 무너지던 소리 우레처럼 산천초목을 흔들고 금수강산을 뒤흔들어 놓을 때 아버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내 피가 끓어오르고 내 송곳니가 단숨에 바위를 뚫고 짐승의 멱을 따듯 자란다 해도 그것을 운명이라 여기고 할아버지의 소명을 받들려 나도 옛 어른이 용맹스럽게 독립운동 했던 아무르를 아무르 강물에 삼단머리 감는 조선 여인을 그리워하며 아무르 표범이라도 되어 백두대간을 오르내리며 안광을 빛내고 싶어 아무리 생각해도 천년 바위가 쩍 갈라지고 빛이 터져 나오며 신화처럼 초인처럼 산신령 할아버지, 범도 이긴다는 허풍 떠는 소를 단숨에 제압하며 바람 같은 발바닥으로 우리의 살붙이와 일가친척이 모여 사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용트림하는 백두대간에 다시 산신령이 돌아왔다는 방이 붙고 죄 지으면 산신령이 물어간다는 말이 나돌아야 한다. 오늘도 할아버지를 해 저물도록 기다리는 이 너럭바위에 내가 차라리 범 한 마리로, 산신령으로 턱 걸터앉고 싶은 -시집 <서울, 365일 시를 만나다> 2023년 발표
김왕노 시인 / 세상에서 가장 긴 팔
세상에서 가장 긴 팔이 그리움이라 했지요. 나도 늘 그리움이란 팔을 당신에게 뻗었는데 당신 내 팔을 본 적이 있나요. 너무 멀리 뻗었으므로 위태하고 팔을 누가 뚝 잘라버릴 것 같아 조마조마하고 두려운데 오늘 밤도 세상에서 가장 긴 팔을, 몇 천리만리 밖에 있는 당신에게 뻗습니다. 뻗은 팔로 당신의 뺨을 어루만지고 고장 난 가전제품을 고쳐주고 목마른 당신에게 물을 떠주고 싶지만 그리움이란 팔은 말미잘 촉수 같아 닿기만 할 뿐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꽃 하나 키우는 기술은 뛰어나 당신이 즐겨 오르는 언덕에 그렇게 향기 좋은 들장미 믿거나 말거나 그리움이란 내 팔이 밤새 키운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당신이 좋아하는 꽃을 못 키우면 어디 사랑이라 할 수 있나요. 당신에게 뻗어 꽃을 키웠던 팔을 거두면 당신이 좋아하는 들장미 냄새 진저리치도록 납니다. 못 견디게 나는 들장미 냄새로 더욱더 그리운 당신입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4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수돗물
수도꼭지를 틀자 좍좍 좌 악 푸른 뱀이 쏟아진다. 한 마리 두 마리 싱싱한 물의 비늘을 가진
푸른 뱀은 우리 생활 속으로 곳곳에 숨어든다. 정수기 안에 똬리도 튼다.
틀었던 수도꼭지를 잠그면 쏟아지던 푸른 뱀의 몸뚱이가 반으로 토막 쳐진다.
재생능력이 강한 푸른 뱀은 잠긴 수도꼭지 안으로 몸을 끌어당겨 갇힌 뱀이 된다.
수도꼭지를 빠져나온 토막 진 뱀은 재빨리 몸을 복원해 밥물도 되고 커피 물도 된다.
지금도 멀고 먼 곳에서 송수관을 타고 수천수만 마리 우리의 푸른 뱀이 오고 있다.
-계간 『시산맥』 2020년 가을호 발표
김왕노 시인 / 아줌마는 처녀의 미래
애초부터 아줌마는 처녀의 미래, 이건 처녀에게 폭력적인 것일까, 언어폭력일까. 내가 알던 처녀는 모두 아줌마로 갔다. 처녀가 알던 남자도 다 아저씨로 갔다. 하이힐 위에서 곡예 하듯 가는 처녀도 아줌마라는 당당한 미래를 가졌다. 퍼질러 앉아 밥을 먹어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 아저씨를 재산목록에 넣고 다니는 아줌마, 곰탕을 보신탕을 끓여주고 보채는 아줌마, 뭔가 아는 아줌마, 경제권을 손에 넣은 아줌마, 멀리서 봐도 겁이 나는 아줌마, 이제 아줌마는 권력의 상징, 그 안에서 사육되는 남자의 나날은 즐겁다고 비명을 질러야 한다. 비상금을 숨기다가 들켜야 한다. 피어싱을 했던 날을 접고 남자는 아줌마에게로 집결된다. 아줌마가 주는 얼차려를 받는다. 아줌마는 처녀의 미래란 말은 지독히 아름답고 권위적이다. 어쨌거나 아줌마는 세상 모든 처녀들의 미래, 퍼스트레이디 계간 『리토피아』 2013년 봄호
김왕노 시인 /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를 때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르고 떠난 후 난 자작나무가 되었다 누군가를 그 무엇이라 불러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때로는 위험한가를 알지만 자작나무나 풀꽃으로 부르기 위해 제 영혼의 입술을 가다듬고 셀 수 없이 익혔을 아름다운 발성법 누구나 애절하게 한 사람을 그 무엇이라 부르고 싶거나 부르지만 한 사람은 부르는 소리 전혀 들리지 않는 곳으로 흘러가거나 부르며 찾던 사람은 세상 건너편에 서 있기도 하다 우리가 서로를 그 무엇이라 불러준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무엇이 되어 어둑한 골목이나 전쟁터에서라도 환한 외등이나 꽃으로 밤새 타오르며 기다리자 새벽이 오는 발소리라도 그렇게 기다리자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불러주었듯 너를 별이라 불러주었을 때 캄캄한 자작나무숲 위로 네가 별로 떠올라 휘날리면 나만의 별이라 고집하지 않겠다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를 때 난 자작나무가 되었다 ― 계간 『문학과 사람』 2019년 여름호
김왕노 시인 / 영일만 물은 아래로 흐르다 고였다가 또 아래가 있다면 아래를 찾아 흐른다. 아래로 흐르며 겸손을 가르친다. 아래는 물의 차지라며 끝없이 흐른다. 바다가 출렁인다는 것은 바다로 흘러든 물의 고집 때문, 조금만 높아도 고소공포증을 이기지 못하는 물의 체질 때문이다. 물은 흘러야만 물이고 아무리 커다란 홀이라도 다 채우려는 자세가 전투 태세 같다. 들판을 푸르게 만드는 것도 물이다. 물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폭포에서 투신하듯 떨어진 물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져도 감쪽같이 스스로 수선하는 물은 섬세한 손을 가진 수선공, 물이 악착같이 아래로 흐르므로 강물이 생기고 개울이 생기고 물길이 생기고 눈물이 생기고 피가 생긴다. 물이 곧 생명이라는 등식을 만들며 물은 흐른다. 물은 흐르므로 물의 질서가 잡히나 흐름을 딱 멈추고 반역하듯 증발하거나 지상을 박찬 물은 구름과 안개가 되었다가 끝내 폭우로 구름의 방전으로 뇌성으로 세상을 온통 흔들어 놓는다. 그것은 물이 자신의 길을 잠시 버렸다는 참회의 통곡이다. 낮은 곳이 아니라 높은 곳을 향하던 물의 꿈이 뚝뚝 부러지는 소리다. 겨울밤에 아버지 공사 현장으로 일찍 떠나면 집안을 가득 울리던 할머니가 가꾸던 콩나물시루에 물 떨어지는 소리로 나는 겨울에도 키가 자랐다. 태몽 깊어가는 밤에 어머니 뒷물하는 소리로 아버지와 사랑이 깊어져 내가 태어났다. 내 기원도 한 방울 물이었다는 것을 내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방울방울 맺혀 있다. 순풍이 불자 수평선을 넘어 항구를 둘러싼 해안선이 모래로 눈부신 나라로 뱃고동 마음껏 울리며 밀항하라고 부추긴 것도 영일만 푸른 바닷물이었다. 한때 나와 영일만과 배짱이 맞던 시절이었다. * 포항의 영일만은 내 고향이다. 언덕에 오르면 갈매기 날리며 가슴에 안길듯 영일만 풍경이 펼쳐진다. 이육사가 영일만을 보고 청포도를 지울 수 밖에 없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1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나와 백석과 하얀 차와 한계령
가난한 내가 나타샤를 사랑하는 백석처럼 누군가를 사랑하면 오늘 밤 푹푹 눈은 내려라. 나도 누군가를 사랑하여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앉아 적설의 량만큼 그리움을 푹푹 쌓는다. 그리움을 쌓으면서 생각한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와 눈이 푹푹 쌓이는 밤에는 차를 타고 한계령을 넘어가 한 살림 차려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그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 누군가는 이 쌓이는 적설의 그리움이라면 아니 올 리가 없다. 한계령을 넘어간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이름을 버리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한계를 넘어가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그 누군가는 나를 사랑하고 주차장에서 하얗게 눈을 뒤집어 쓴 차는 오늘 밤이 좋아 부릉 부릉 혼자서 시동을 걸어 볼 것이다. *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고
김왕노 시인 / 이제 조금 명랑해졌으면 좋겠어요
우리 어떤 일이 있어도 명랑해졌으면 좋겠어요. 깨뜨린 컵으로 불길을 점치며 조심조심 걷는 것도 좋지만 명랑 하라, 알버트야, 명랑 하라 아담아, 이브야! 외쳤으면 좋겠어요. 그레고리 잠자 마저 갑충이나 명랑으로 버둥거리면 좋겠어요. 햇살 쏟아지는 텃밭에 얼마나 푸성귀는 명랑합니까. 안개 자욱한 샛강의 적막을 깨고 갑자기 튀어 오르는 잉어는 명랑으로 온몸이 번쩍거려요. 명랑은 전염성이 강해 암나사와 수나사를 깎는 선반도 명랑, 그리고 명랑한 공장, 명랑한 아가씨, 명랑한 아줌마 아저씨는 얼마나 건강하고 신선해요.
명랑한 무인도, 장대 끝에 꾸덕꾸덕 마르며 맛들어가는 명랑한 서대, 명랑한 자전거, 명랑한 휘파람, 명랑한 입술, 명랑을 접두사로만 붙여도 명랑으로 통통 튀어오를 거리이고 명랑한 난전 명랑한 광장, 명랑 하라, 역사여, 명랑 하라, 반도여, 명랑 하라, 건반이여! 하며 낙서해도 좋고 명랑한 벚꽃 아래로 명랑한 백년 할머니가 가고 명랑한 개가 뒤를 졸졸 따르고 명랑의 뇌관을 터뜨렸듯 연쇄반응으로 일어나는 명랑. 죄수도 간수도 명랑, 발롱발롱하며 명랑
코로나니 팬데믹 시대니 부정적인 단어가 판을 쳤지만 이제 우리 명랑해 볼래요. 말장난이 심하다고요. 속 모르는 장난 그만 치우라지만 우리 명랑해 질수 있어요. 명랑한 커피숍에서 만나 명랑한 커피도 마시고 전시된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보며 프리다 킬로마저 명랑하기를 빌어준다는 것은 좋은 일, 명랑한 사람이므로 가능한 일, 명랑한 애인, 명랑한 바퀴벌레, 명랑한 별, 명랑한 자작나무, 듣기만 해도 얼마나 좋아요. 명랑한 사람은 전쟁을 싸움을 거부해요. 우리는 원래 명랑한 민족, 그러나 이제는 명랑이 멸종되었는지 보이지 않아 고민과 고난이었으나, 자 얼굴을 활짝 펴고 명랑
또 한 번 명랑, 명랑, 우리 이제 조금 명랑해 졌으면 좋겠어요.
-웹진 『시인광장』 2023년 5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지구의 오후에 쓰는 편지
늙은 사랑아, 지구의 오후에 네게 편지를 쓴다. 허물어진 담장 아래 봉선화가 머금은 희망에 대하여 부러진 고목에 다시 나는 싹에 대하여 망친 인생을 다시 고쳐보려 앙다문 입술에 대하여 늙은 사랑아, 편지 한 장으로도 지구의 오후에 봄이 오고 종달새 날고 버들치 반짝이는 강물이 편지 속에 흐르고 우리가 잃어버린 반딧불이 반짝이고 소쩍새 우는 왕 버드나무숲이 있고 서리하기 좋은 과수원의 사과는 푸르나 벌써 맛이 들었다. 지구의 오후에 쓰는 편지 속으로 불어온 바람에 메밀꽃 하얗게 일고 먼 하늘에서 마른번개가 치고 행군에 나섰다가 돌아오지 않는 군인과 날 저물어도 고목에 깃들지 않는 새떼가 궁금하다. 늙은 사랑에게 쓰는 겨울편지에 쌓인 숫눈을 밟고 천사의 나라까지 걸어가려는 맨발의 꿈도 내게 있다.
지구의 오후에 늙어가는 사랑에게 쓰는 편지 속에 늙은 우리지만 죽창이라도 깎아야 할 대나무 숲이 푸르고 갈아엎어 우리 밀 수천수만 평을 심어야 할 묵정밭이 있고 칠월칠석이면 오작교를 놓아야 할 까치와 까마귀가 날고 제비가 날고 용트림치는 백두대간과 신화의 별이 뜨는 자작나무 숲이 푸르다.
늙어가는 사랑에게 가는 편지 속에는 우리가 유토피아로 가는 길 늙은 사랑이 아니면 누구도 해독하지 못할 보물을 찾아가는 보물지도가 그려져 있을지 모른다. 그것보다 들키면 세상이 발칵 뒤집힐 늙어가는 사랑과 나와의 오래된 밀어가 난류처럼 흐를 것이다. 지구의 오후에 쓰는 늙어가는 사랑에게 가는 한 장의 편지에 나는 이제는 내 이야기를 쓸 수 있고 세상을 담을 수 있는 크나큰 능력자가 된 것이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8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한 방울의 여자
나도 오규원 시인이 한 잎의 여자를 사랑하듯 사랑한 한 방울의 여자가 있었네. 약한 표면장력으로 손만 닿으면 톡 터질 것 같은 연약한 여자. 조금만 날 더우면 증발해 구름으로 흘러갈 여자. 내 사랑이라 부르면 놀라서 톡 떨어질 한 방울의 여자. 인공눈물 같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여자. 한 방울의 여자 너무 수줍어 어둠의 잎새에 맺혀있던 한 방울의 여자. 한 방울의 여자지만 한 방울의 물 같았던 여자. 갈증 난 혓바닥을 톡 터져서 물로 적셔주고 아아 사라지려던 한 방울 물 같았던 여자. 밤하늘에 맺힌 별보다 더 영롱했던 한 방울의 여자. 한과 사리 같이 그리움으로 익어 때론 한 방울의 단단하고 당당했던 여자 나도 오규원 시인이 한 잎의 여자를 사랑하듯 사랑한 한 방울의 여자가 있었네. 입안에서 오래 굴리고 굴려도 달콤했던 한 방울의 여자. 자신이 닳아가더라도 내 혀를 행복하게 해주던 한 방울의 여자, 돌 사탕 같은 한 방울의 여자. 내가 한눈을 팔면 또르르 굴러 어딘가로 사라질 것 같은 한 방울의 여자 나도 오규원 시인이 한 잎의 여자를 사랑하듯 사랑한 한 방울의 여자가 있었네. 끝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어디로 간지도 모르는 내 애달픈 여자. 내게도 사랑한 한 방울의 여자가 있었네. 지금도 영원한 내 사랑이라며 찾아 나선 여자. 한 방울의 여자가 있었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2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화무십일홍
물이 늘 샘솟는 커다란 연못이 논 곁에 있으므로 상답이라 어느 논보다 소출이 많아 누구나 부러워했던 논인데 세월 가니 아버지도 가시고 논도 남에게 그저 지어 먹으라 소작 주고 아버지 생각날 때마다 연못을 탑돌이 하듯 도는데 연못가에 뿌리를 뻗어 연못물을 다칠까 나무 한 그루 심지 못하도록 살아생전 늘 당부했는데 몇 년 전 연못가에 심은 목련 몇 그루 목 백일홍 몇 그루가 제법 자라 처녀티를 내듯 꽃을 피우고 방생한 잉어도 팔뚝 만해져 펄떡 뛰어올라 떨어질 때마다 커다란 파문으로 일어나 빙그레 퍼지던 아버지 말씀, 지는 꽃을 볼 때마다 하시던 화무십일홍이라던 말씀 나도 화무십일홍이라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언젠가 지는 꽃이라던 말씀 나는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연못가에 꽃을 심은 불효막심한 놈이지만 꽃 필 때마다 아버지가 꽃으로 피어 살아서 돌아오신 것 같고 꽃그늘 짙을 때는 아버지 슬하 같고 꽃 질 때는 화무십일홍 아버지 같고 뚝뚝 지는 꽃이 북망산천으로 되돌아가는 기러기, 기러기 같아 눈물 났는데 나는 멀지 않아 연못가에 정자도 지을 것이다. 정자 곁에 어머니 좋아하는 수양버들도 심어 어머니와 봄나들이도 하고 여름이면 정자에 누워 개구리 울음 속에 익어 가는 알사탕만한 별을 보며 수없이 많은 은하가 있다는 우주 속으로 상상의 혓바닥을 조갯살처럼 밀어 넣을 것이다. 정자에다 너를 꽃이라 부르고 열흘을 울었다는 내 졸시도 편액으로 걸고 내 낙향한 것이 천만다행이라며 푸른 논을 건너온 바람에 온몸을 맡기고 정좌해 아버지 부르던 서편제 한 대목 꺼이꺼이 부를 것이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9월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명희 시인 / 대유목 시대 외 10편 (0) | 2025.06.15 |
---|---|
장정욱 시인 / 까만 입술로 말을 걸어 왔네 외 10편 (0) | 2025.06.15 |
강성애 시인 / 봄꽃 엔딩 외 4편 (0) | 2025.06.15 |
정규범 시인 / 23.5 (0) | 2023.06.03 |
이영광 시인 / 로보캅 (0) | 2023.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