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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유석 시인 / 깡통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6. 2.

김유석 시인 / 깡통

 

 

툭, 차버리고 싶은 감정과 툭 차이는 감정 중 소리를 내는 것은 어느 쪽일까

채워지기 전과 채웠다 비워낸 공간 가운데 어느 편이 더 시끄러울까

통과 깡통의 차이, 깡통을 차다와 깡통 차다 사이

만들어질 때 미리 담긴 소음인지 비워진 후의 울림인지 깡 찬 소리가 난다

몇 배 새끼를 빼낸 뒤 뱃가죽 축 늘어진 늙은 돼지를 이르기도 하는 속된 말, 깡통이 뭐길래

깡통을 보면 차고 싶어지나

그 속에서 뭐가 튀어 나와 참새들을 화들짝 놀라게 하나

깡통을 깡통으로만 아는 순 깡통들, 납작하게 눌러 밟아버리면 차라리 나을 건데

톡, 톡, 누군가 자꾸 나를 걷어차기만 한다

 

 


 

 

김유석 시인 / 천형天刑

 

 

네 쌍의 눈을 달고도, 공중거미는 먹이를 직접 사냥하지 못한다.

 

형체가 흐릿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공중에 줄을 치면서부터

 

또렷하던 그의 홑눈은 여러 겹 상을 맺는 겹눈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사냥 대신 기다림이 생긴 그 후, 진화와 퇴화가 동시에 멈춰버린 공중에

 

거미는 거꾸로 매달려 살게 되었다. 거꾸로 보면

 

세상이 잠깐 또렷해지거나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기 때문 일거다.

 

 


 

 

김유석 시인 / 영역(領域)

 

 

줄이 풀리자 득달같이 문간으로 달려간 그는

찔끔찔끔 오줌을 지려댄다.

오랫동안 응시했던 곳, 마당 구석이나 뒤울안

자주 귀를 부스럭거리게 하던 곳을 발톱으로 긁어가며

가장 원초적인 저의 냄새를 묻힌다.

 

눈길이 닿지 않는 곳

먼 소리가 오는 곳까지 미치는 줄 알았다.

감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성가시게 해온 줄 알았으나

 

그를 묶어놓은 것은

겨우

그의 똥오줌 냄새가 뻗히는 곳

 

찌그러진 밥그릇이 보이는 그 안을

쫑긋거리고 짖어댔던 것이다.

물어뜯을 듯 당기던 앙칼진 사슬은

느슨해지는 그 주변을 경계하는 거였는데

 

묶어야만 보이고 들릳던 것들

줄과 함께 사라지고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하고많은 밖이 찾아들기 시작했다.홀연

묶였던 자리 꼬리만을 남겨둔 채

 

그러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김유석 시인

1960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 전북대학 문리대를 졸업. 198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신월기계화단지〉가 당선되어 등단. 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으로 『상처에 대하여』 『놀이의 방식』 『붉음이 제 몸을 휜다』가 있음. 2015년 제5회 웹진 『시인광장』 시작품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