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허수경 시인 / 동백 여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6. 2.

허수경 시인 / 동백 여관

 

 

눈이 왔다

 

울음 귀신이

동백처럼 붉은 전화를

길게 걸어왔다

 

절[寺]은

눈처럼 흩날렸고

산은

눈처럼 흐느꼈고

 

아무도 잠들지 못하던 방은

눈처럼 떠나갔다

 

 


 

 

허수경 시인 / 베낀

 

 

구름을 베낀 달

달을 베낀 과일

과일을 베낀 아릿한 태양

태양을 베껴 뜨겁게 저물어가던 저녁의 여린 날개

그 날개를 베끼며 날아가던 새들

어제의 옥수수는 오늘의 옥수수를 베꼈다

초록은 그늘을 베껴 어두운 붉음 속으로 들어갔다

내일의 호박은 작년 호박잎을 따던 사람의 손을

베꼈다

별은 사랑을 베끼고

별에 대한 이미지는 나의 어린 시절을 베꼈다

이제는 헤어지는 역에서 한없이 흔들던 그의 손이

영원한 이별을 베꼈다

오늘 아침 국 속의 붉은 혁명의 역사는

인간을 베끼면서 초라해졌다

눈동자를 베낀 깊은 물

물에 든 고요를 베낀 밤하늘

밤하늘을 베낀

박쥐는 가을 잠에 들어와 꿈을 베꼈고

꿈은 빛을 베껴서 가을 장미의 말들을 가둬두었다

그 안에 서서 너를 자꾸 베끼던 사랑은 누구인가

그 안에 서서 나를 자꾸 베끼는 불가능은 누구인가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중에서

 

 


 

 

허수경 시인 / 입술

 

 

너의 입술이 나에게로 왔다

너는 세기말이라고, 했다

 

나의 입술이 네 볼언저리를 지나갔다

나는 세기초라고, 했다

 

그때 우리의 입김이 우리를 흐렸다

 

너의 입술이 내 눈썹을 지나가자

하얀 당나귀 한 마리가 설원을 걷고 있었다

 

나의 입술이 너의 귀 언저리를 지나가자

검은 당나귀 한 마리가 석유밭을 걷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거리의 모든 쓰레기를 몰고 가는 바람

 

너의 입술이 내 가슴에서 멈추었다

나의 입술이 네 심장에서 멈추었다

너의 입술이 내 여성을 지나갔다

나의 입술이 네 남성을 지나갔다

그때 우리의 성은 얼어붙었다

 

말하지 않았다

입술만 있었다

 

 


 

허수경(許秀卿) 시인 (1964~2018)

1964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7년 《실천문학》복간호에 시가 실리면서 등단. 시집으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등과 수필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그리고 번역서 『끝없는 이야기』가 있음. 2?001년 동서문학상, 2016년 전숙희문학상과 '제15회 이육사문학상' 수상.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 2018년 10월 3일 독일에서 위암투병 중 별세.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규범 시인 / 23.5  (0) 2023.06.03
이영광 시인 / 로보캅  (0) 2023.06.02
김유석 시인 / 깡통 외 2편  (0) 2023.06.02
김정임 시인 / 탄생 외 2편  (0) 2023.06.02
윤후명 시인 / 강릉 별빛 외 2편  (0) 2023.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