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향기] 수도회 창설자를 찾아서 / 성녀 쟌 쥬강
경로 수녀회 창설
만약 오늘 길을 가다가 병들어 쓰러진 눈먼 할머니 한 명을 우연히 발견한다면, 그 할머니를 업어와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그를 대신해서 동냥하러 다닐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전세계 3천 8백여 명 회원이 가난한 노인들을 돌보고 있는 ‘경로 수녀회(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는 이렇게 사랑의 첫발을 뗀 성녀 쟌 쥬강(1792-1897)에 의해 단순하게 시작됐다. “가난한 이가 바로 우리 주님이심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는 쟌 쥬강의 고백은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 체현한 ‘가난의 영성’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쟌의 생애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평범한 여인으로 살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인내롭게 기다려온 47년, 가난한 노인을 대신해 동냥 다니며 그들을 위해 열렬히 일했던 12년, 그리고 숨은 수도자로서 산 마지막 27년. 쟌은 책을 저술하지도 않았고 많은 말을 남기지도 않았으나 그녀가 살아온 삶 자체가 ‘거룩한 가난’의 복음적 가치를 증거 한다.
쟌은 1792년 10월 25일 프랑스 브르따뉴 지방 조그만 어촌인 깡깔에서 태어났다. 쟌의 아버지 죠제프 쥬강은 쟌이 4세 되던 해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실종돼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쟌은 혼자 어렵게 살림살이를 꾸려나간 어머니 슬하에서 기도와 교리, 읽고 쓰는 법, 뜨개질 등을 배우며 성장했다.
쟌의 착한 심성을 알았던 청년이 그녀에게 청혼을 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저를 원하십니다. 아직 알려지지도 않았고 설립되지도 않은 어떤 사업을 위해 나를 점지하고 계십니다”라며 그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 후 쟌은 자신도 모르는 어떤 소명을 기다리며 살았고, 47세 중년이 될 때까지 긴 성숙기를 거치게 된다. 이 기간 중 그녀는 성 요한 에우데스의 영성을 따르는 ‘탄복하올 어머니 마리아의 성심 제3회’에 입회해 영적 토양의 기초를 닦았다.
1839년 초겨울 어느 날 만난 맹인 할머니 안 쇼뱅의 주름진 얼굴은 쟌으로 하여금 더 이상 주저할 수 없는 어떤 용단을 내리게 했다.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하느님의 부르심이었다. 그녀는 할머니를 등에 업고 좁은 층계를 걸어 올라와 자신의 침대를 내어주고 자신은 다락방에서 살았다. 얼마 되지 않아 또 한 명의 노인을 데려왔고 이렇게 식구는 점점 늘어났다. 이 일에 다른 두 명의 처녀가 합세, 규칙적인 기도와 공동생활을 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자매들’이라는 새로운 공동체가 시작됐다.
이때부터 쟌의 두 번째 생애가 열렸다. 쟌은 시 당국이 걸인들에게 동냥을 허락하는 표시로 주었던 표찰을 달고 그들을 대신해서 구걸 행각에 나섰다. 날로 늘어나는 노인들에게 양식과 의복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기에 쟌은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모금을 했다.
쟌이 직접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다음의 노래 가사는 그녀의 영성을 잘 표현해준다 “빵 구하러 다니는 작은 자매에겐 만사가 언제나 좋고도 좋은 법. 앞으로 앞으로 더 빨리 나아가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 생각하고, 언제나 작고도 작게 되어 나를 잊어버리도록 하세. 항상 힘들지 않게 고분고분, 무엇이든 거절마세. 빵 구하러 다니는 작은 자매에겐 만사가 언제나 좋고도 좋은 법.”
그러나 ‘수도회 창설자’라는 자긍심조차 쟌에게는 부유한 것이었는지, 공동체 지도신부는 쟌이 아닌 다른 젊은 수녀를 최초의 수녀이자 원장으로 임명하게 된다. 쟌은 이 일을 하느님의 사업으로 생각했기에 지도신부에게 순명했지만, 원장으로 임명된 젊은 수녀는 진실과 순명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임종 직전에 자신이 창설자가 아니라는 진실을 밝히고 숨을 거둔다.
쟌은 27년간 완전히 그늘에 숨겨져 있어야 했다. 따라서 쟌이 남긴 말은 대부분 수녀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록된 것이며, 그녀가 남긴 필적은 수녀회가 고정 수입을 두는 것을 반대한다는 단 하나의 사인밖에 없다. 수녀회가 고정 수입을 두지 않고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 모금을 하는 것이 지금까지도 수녀회 정신으로 이어 내려오고 있다.
쟌은 만년에 자신이 처음 데려온 할머니처럼 앞을 거의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쟌은 심안(心眼)으로 하느님을 직관할 수 있었기에 “여러분도 늙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겠지요. 내게는 이제 하느님만 보일 따름입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에게 기대를 두지 않고 하느님만을 바라보게 하는 가난은 축복이었다. 쟌은 ‘가난은 나의 소중한 보물’이라고 했다. 그래서 쟌은 맨손이라도 부유할 수 있었고 보살펴야 할 사람이 많아도 근심하지 않았다. 가난은 감사를 낳았고 감사는 기쁨을 낳았다. 가난한 사람은 작은 호의에도 감사하듯이 하느님께 언제나 감사를 잊지 않았던 쟌은 후배 수녀들에게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주 작고 아주 겸손한 이로 남아 있으세요. 하느님 앞에서 작고 작아져야 합니다. 기도할 때면 그같이 작은 모습으로 시작하세요. 하느님 앞에 조그마한 개구리처럼 엎디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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