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성인] 성 토마스 베켓(1118-1170) 윤 클레멘트 신부
하느님과 교회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순교자, 토마스 베켓은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는 두뇌가 명석하여 프랑스의 파리대학에 유학하여 우수하게 졸업한다. 부친 사망 후, 궁핍한 가정 형편으로 1141년에는 켄터베리 대주교관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되는데, 대주교의 신임을 얻고 국왕이던 헨리 2세의 추천을 받아 다시 볼로냐와 오세르 대학 등에서 법학을 공부한다.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1154년에 부제로 서품되고, 1155년에는 헨리 2세에 의하여 37세의 나이에 영국의 수상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1162년에 헨리 2세는 자신에게 유리하겠다는 판단으로 그를 켄터베리의 대주교가 되게 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와 왕 사이에 갈등과 대립, 어둠과 박해는 시작된다.
그는 대주교로 임명된 후, 바로 수상직을 사임하고 자신의 생활방식을 전적으로 쇄신한다. 그는 과거의 호화로운 생활을 일소(一掃)하고 수도자와 같은 검소한 생활로 바꾸었으며, 단식과 고행, 빈민구제와 자선사업, 그리고 교구를 위해 헌신적 노력을 다한다. 한편 왕은 점점 교회의 일들에 관여하고 교회의 권리들에 간섭하면서 그와의 타협을 시도한다. 한때 그는 왕과의 화해를 위해 타협에 가까운 교회재판소의 재판관 부정, 교황청에 직접 상소하는 것을 막는 클라렌든 헌법(Constitutions of Clarendon)의 인준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그는 이 헌법을 부정하고 프랑스로 떠나 퐁티니의 시토 수도원에서 6년간 피란생활을 한다.
왕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켄터베리 교구의 신자들에게 박해를 한다. 급기야 교황 알렉산더 3세의 권고를 받고, 그 자신의 교구로 돌아온다. 하지만 왕 의 교회에 대한 간섭은 계속되었고, 그는 번번이 부당한 왕의 요구들을 반대하면서 교회 권리들을 옹호한다.
어느 날, 왕은 지나가는 말로 격분하여 말한다. "누가 저 말썽쟁이 성직자를 없애주지 않는가?" 이 말을 들은 기사 네 사람은 왕의 그 말을 참말로 받아들이고 주교좌 성당으로 가서 경본을 보고 있던 그를 때려눕히고 살해하기에 이른다. 그의 순교소식을 들은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는데, 그는 바로 순교자로 선포된다. 그의 무덤은 순례의 성소가 되는데, 후일 친구이기도 했던 헨리 2세는 그의 무덤에 가서 통곡하였다고 전하여진다. 후 일 헨리 8세는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유골들을 흩어버리게 하였지만, 하느님의 진리와 교회를 위해 목숨까지도 내놓았던 그는 여전히 성인으로 남아있다. 성인은 말했었다.
"여러분은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고 교회가 얼마나 큰 시련 가운데에서 자라났으며, 그리스도를 선장으로 모시는 베드로의 배가 얼마나 큰 풍랑을 이겨냈고, 시련 속에서도 신앙을 드러낸 이들이 어떻게 월계관을 받게 되었는지 기억하시오. '선한 싸움을 싸운 사람만이 월계관을 얻는다'는 말은 성인들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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