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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착한 사마리아인 / 고흐

by 파스칼바이런 2011. 11. 22.
착한 사마리아인 / 고흐

 

착한 사마리아인 / 고흐

(1890년. 착한 사마리아인, 73x59.5c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권용준

 

과거의 위대한 천재 가운데 당대의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지 못해 비난과 멸시 속에서 참담하게 살아간 사람들이 많다. 이런 예를 보면 ‘인간은 과연 그 시대를 벗어난, 자기들과는 다른 사고와 삶의 방식을 가진 이들을 품에 안지 못하는 편협하고 옹졸하기 짝이 없는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예술사상 짧은 인생 동안 그런 질곡의 삶을 살면서도 활화산 같은 예술 혼을 분출했으며, 죽음의 강박에서 벗어나고자 부질없는 몸부림을 친 처절한 예술가가 있으니 바로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년)이다.

 

오늘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그는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화가이며, 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위대한 예술가로 인정받는다. 오늘 우리가 고흐의 그림을 보면서 행복에 젖는다면, 그 행복감은 바로 고흐의 개인적 불행이라는 토양에서 피운 꽃과 같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흐가 예술에 열중한 기간은 생의 마지막 6년이다. 그 기간에 1천 500여 점의 그림을 그렸으나 생전에 단 한 점만을 팔았을 뿐이다. 이런 절망과 좌절할 수밖에 없는 천재가 정신적 파탄을 겪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 한 순간 이런 정신병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고흐는 생레미 요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병실 벽면에 걸린 강렬한 색감을 앞세운 낭만주의의 거장인 들라크루아가 그린 종교화 ‘피에타’와 ‘착한 사마리아인’을 보고는 따라 그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자신이 겪는 고독과 정신적 파탄에 대한 무력감을 극복하려는 간절한 구원의 바람 때문이 아니었을까? 따스한 눈길과 든든한 어깨를 제공하는 아무 이웃도 없는 암울한 상황에서 그는 37세의 나이에 죽음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고, 세상에 행복의 빛과 풍요한 색감을 선물로 남긴다. 그렇게 그는 좌절 속에서 빛나는 불꽃이었다.

 

고흐에게 필요했던 진정한 이웃은 누구인가? 아니 현재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이웃은 누구이며, 우리가 또한 그들의 이웃이 되고 있는가? 진정한 이웃의 의미를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루카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29-37)가 그것이다.

 

이스라엘 북부의 사마리아는 지리적 여건상 일찍이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로마 제국을 비롯한 이민족에게 점령을 당하기 일쑤였고, 그런 와중에 혼혈아가 많았던 곳이다. 유다인들은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던 구약의 계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사마리아인을 개로 비유하고, “사마리아인의 빵을 먹는 사람은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과 같다.”며 이들을 가혹하게 멸시하였다.

 

예수께서는 어느 율법교사가 던진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사마리아인을 예로 들어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놓고 가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29-37).

 

반 고흐의 그림은 이 주제를 잘 다루고 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그림 중앙의 두 인물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단말마의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을 자신의 나귀에 올려 태우는 모습이다. 사마리아인은 이 환자를 구하려고 혼신의 힘을 쏟는다. 무게를 이기려고 뒤로 젖혀진 상체와 머리, 그를 밀고 있는 어깨와 팔이 그것이다. 그리고 더욱 힘을 쏟으려고 신발 위로 들린 오른쪽 다리는 어떤가? 환자를 들어 올리는 이 사람의 선행에 일조하려는 듯 노새조차 두 다리를 모아 꼿꼿하게 버티고 있으며, 힘을 주느라 애쓰는 얼굴 표정이 특히 인상적이다. 비록 미물이지만 그 선행을 위해 한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연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림 왼쪽에는 모든 재물이 사라진 빈 상자가 나뒹굴고 있고, 그 뒤로는 이기심에 사로잡혀 총총히 사라져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이 보인다. 이들이 사라져가는 그 길과 그 끝은 가물거리고 모호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이들의 데생 또한 명확하지도 않고 얼굴조차 드러내지 못한 모습이 신앙의 본분을 망각한 부끄러움으로 가득해 보인다. 특히 이 그림에서 고흐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대신 그렸는데, 이는 남을 섬기고자 자신을 희생한다는 그의 신앙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그의 신앙심은 한때 목사가 되고자 했고, 여의치 않자 탄광의 간호사가 되고자 했던 마음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선생님이었던 멘데스다 코스타에 따르면, 학창시절 고흐는 미술품을 복제한 듯한 작은 석판화 인쇄물을 잔뜩 가져오고는 했는데, 늘 심하게 상해 있었으며 그 테두리에는 “준주성범”의 저자인 토마스 아 켐피스의 책과 성경에서 인용한 글귀로 가득했었다.

 

이는 고흐 자신의 삶에 깊은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고흐 자신이 그리스도의 영적 가르침을 일상에서 실천하고자 했던 진정한 그리스도인임을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곧 그는 자신이 강도를 당한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모든 사람의 이웃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고흐는 들라크루아의 붉은 사마리아 사람의 옷을 노란색으로 대치시키고 있다. 고흐에게 노란색은 행복을 의미하는 색으로, 이런 전이는 결국 이웃을 향한 봉사와 희생은 자신과 모두의 행복을 전제로 한 것임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그림의 두 인물 주변을 그린 붓칠이 고흐 특유의 불길처럼 위로 치솟는 듯 타오르고 있다. 이 붓질은 삶과 생명을 향한 열정의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이 그림은 뚜렷한 색상대비와 강한 인물의 윤곽선 등, 당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일본의 채색목판화 우키요의 단면을 엿볼 수 있으며, 동시에 신학을 공부한 고흐의 간절한 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과연 마음에 진정 이웃이라는 이름을 새기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예수께서는 단절보다는 소통을, 반감보다는 호감을, 이기심보다는 이타행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것 아닌가? 반목하고 질시하고 무시하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희생과 봉사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진정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장애인, 노숙자, 병자들, 외국인 노동자, 북한 주민들, 자연재해로 신음하는 사람 등 힘없는 민초들 모두가 우리의 진정한 이웃임을 정신파탄이라는 광기의 상태에서도 알려주려고 노력한 고흐의 마음이 그래서 더욱 애처롭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 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로마 12,15-16).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이웃됨이며 사랑이다. 고흐의 그림에 나타난 사마리아 사람의 힘든 몸짓에서 행복을, 사마리아 사람에게 자신을 의탁한 사람에게서 따스한 위안을 보는 것은 바로 이들 둘이

 

꼭 달라붙은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임을 읽는다면, 그 마음에 이미 사랑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있음일 것이다.

 


 

권용준 안토니오 / 문학박사. 한국디지털대학교 교수. 미술비평가.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와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