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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빵과 설탕과자가 있는 정물 / 게오르크 플레겔

by 파스칼바이런 2011. 11. 22.

 

 

빵과 설탕과자가 있는 정물 / 게오르크 플레겔

(1610년경. 목판 위에 유화, 21.7x17cm. 독일 프랑크푸르트 시립미술관)

 

권용준

 

역대 화가들은 많은 정물화를 남겼다. 아마도 곧 사라질 생명의 경이를 영원히 남기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물은 생명력을 잃은 자연, 곧 박제된 자연이다.

그래서 정물을 영어로 ‘고요한 생명(Still life)’이라고 부르며, 프랑스어로는 ‘죽은 자연(Nature morte)’이라고 한다.

이는 예술가들이 정물화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지나감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했지만, 실상은 세속적 삶의 허무와 인간 욕망의 덧없음, 곧 바니타스(Vanitas)라는 죽음의 이미지를 새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가들이 정물화를 주된 장르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에 들어서이다.

특히 정물화를 주로 그린 곳은 미술의 메카인 이탈리아나 프랑스가 아닌 북부 독일과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플랑드르 지역이었다.

일찍이 무역업과 상공업이 발달해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그 부를 토대로 허영과 사치가 극에 달했던 나라들이다.

이들은 아마도 그 풍요로운 일상과 멈출 줄 모르는 자신들의 욕망과 허세에 대해 일종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그림을 통해 인간 욕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그려낸 것은 아닌가?

 

이 시기에 독일을 대표하는 바로크 화가로 게오르크 플레겔(Georg Flegel. 1566-1638년)이 있는데, 그는 정밀하고 사실적 묘사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독일 최초의 정물화가로 명성을 쌓은 사람이다.

그는 식탁을 주로 그렸는데, 꽃과 과일이 곁들여진 멋진 식사와 화려한 식도구들이 주를 이룬다.

이런 그의 그림은 당시 귀족사회의 요리문화가 얼마나 호사스러웠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주로 여섯에서 아홉 가지의 코스 요리가 주를 이루었던 식사는 반드시 맛나고 아름다운 디저트로 마무리가 되었다.

특히 산해진미가 식탁에 넘쳐나는 사치스런 음식문화가 발달하면서 식도락가들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디저트에 쏠렸다.

 

당시 디저트로 가장 각광받던 것이 설탕과자류이다.

원래 약제로만 이용되던 설탕이 꿀을 대신해서 새롭게 식용감미료로 대체되었으며, 실제 음식 맛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설탕과자류가 그림에 등장한 것이 1600년경으로, 게오르크 플레겔의 ‘빵과 설탕과자가 있는 정물’이 귀족들의 새로운 식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정교한 포도주 잔과 커다란 빵 그리고 결정체의 설탕으로 조리된 다양한 형태의 과자와 과일들이 세심하게 표현되어 있다.

당의를 입힌 설탕과자들은 누에고치 모양을 하고, 곤충과 식물이 그려진 검푸른 오자기에 가득 담겨있다.

그리고 각양각색의 설탕과자들이 테이블에 늘어져 있는데, 그림 오른쪽에는 왕설탕 가루를 잔뜩 입힌 무화과가 두 개 있고, 문자 형태로 조리된 다른 과일들이 있다.

빵 옆에는 부서졌지만 A자 형태의 과자가 있고, 앞으로는 커다란 O자형으로 만들어진 과일이 보인다.

빵 위로는 대들보 모양의 긴 설탕막대가 가로놓여있다.

이런 디저트용 과자와 빵 이외에도, 플레겔은 몇 마리의 곤충을 그리고 있는데, 도기 안의 과자 위에는 날개에 설탕을 묻힌 나비가 살짝 내려앉고 있으며, 빵 위로는 커다란 벌이 한 마리 앉아있다.

그리고 그림 아래로는 설탕과일들을 향해서 한 마리의 딱정벌레가 달려들고 있다.

 

이 시대의 음식문화와 단맛을 향한 인간들의 욕망을 그린 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좀 색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플레겔은 이 그림의 형상 속에 종교적 의미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우선 그림 속 과자의 A자 O자의 경우, 이 글자들은 형태상 그리스 알파벳의 처음과 마지막 글자인 A(알파)와 Ω(오메가)를 암시한다.

이 두 문자는 그리스도의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묵시 1,8)라는 말씀과 “다 이루어졌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묵시 21,6)라는 말씀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빵과 그 위의 설탕막대가 이루는 십자가 형상 역시 다가올 예수의 수난과 권능을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빵과 더불어 두 개의 손잡이 아래로 포도송이가 늘어진 멋진 암포라 잔의 포도주는 성체의 의미를 환기시키고 있음을 쉽사리 확인할 수 있다.

 

플레겔은 식탁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곤충류나 동물류를 즐겨 그리기도 하였는데, 이들 역시 플레겔에게 나름의 독특한 종교적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고기가 인간의 탐욕과 욕망인 반면 청어는 절제의 상징이다. 파리는

부패를 좋아하며 아무리 쫓아도 되돌아오는 속성 때문에 인간의 탐욕과 쾌락의 욕정이며, 결국 이로 말미암아 맞게 될 불행과 죽음이다.

달팽이는 죄의 짐을 지고 땅에 붙어 기어야 하는 운명이기에 죄를 범하고 이 세상에 온 인간이자, 동시에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한 구원이라는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가재 등의 갑각류가 담백한 음식이기에 역시 욕망의 절제와 연관이 있으며 동시에 자유자재로 옮겨 다닐 수 있기에 선택에서의 자유의지를 말한다.

 

이 그림의 경우 오자기에 담긴 고치모양의 과자 위에 앉은 나비는 번데기에서 탈바꿈했듯이 예수님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의미하며, 죽은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를 통해 새 생명을 얻었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구원받은 영혼을 상징한다.

특히 포도주 잔 옆에 있는 하트 모양의 밀전병은 성체로, 인간을 사랑하는 예수의 마음과 그 사랑으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고통을 암시한다.

그림 속 두 개의 무화과는 포도나무와 더불어 인간의 욕망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로 다음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어둠을 보내시어 캄캄하게 만드셨어도/ 저들은 그 말씀을 거역하였다./ 저들의 물을 피로 바꾸시어/ 물고기들을 죽게 하셨다./ 임금들의 방에 이르기까지/ 저들의 땅이 개구리 떼로 들끓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자 등에 떼가 모여들고/ 저들의 온 영토에 모기떼가 모여들었다./ 비 대신 우박을,/ 타오르는 불을 저들 땅에 내리시고/ 저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그 영토 안의 나무들을 부러뜨리셨다./ 그분께서 말씀하시자 메뚜기 떼가,/ 누리 떼가 수도 없이 몰려와/ 저들 땅의 풀을 모조리 먹어버리고/ 들판의 열매를 먹어버렸다”(시편 105,28-35).

 

이런 의미에서인가, 그림 아래쪽에는 한 마리의 딱정벌레가 설탕과자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

딱정벌레는 메뚜기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탐욕과 욕망을 상징하며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악의 화신으로, 설탕으로 상징되는 삶의 허영과 사치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

결국 욕망을 자제하지 못해 구원의 손길을 거부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달콤함이란 무엇인가?

십자가 모양의 빵 위에 있는 커다란 벌을 보자.

비례에 맞지 않는 그 거대한 모습이 우스꽝스럽지만, 그 모습이 범상치 않다.

벌은 일차적으로 꿀이나 설탕과 연관된 만큼 달콤함의 상징이다.

그러나 지금 이 벌은 비례를 벗어난 과장된 크기로 보아 감각적인 유혹의 달콤함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그림의 주된 오브제인 설탕과 함께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영적 달콤함’의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종교적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곧 성체와 성혈이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마음과 사랑을 깨우치는 것이 진정한 달콤함이요 설탕과자와 같은 기쁨이라는 것을 알 때, 플레겔의 이 그림이 갖는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권용준 안토니오 / 문학박사. 한국디지털대학교 교수. 미술비평가.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와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