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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최후의 만찬 /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by 파스칼바이런 2011. 11. 24.
최후의 만찬 /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최후의 만찬 /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1480년. 프레스코화, 400x800cm. 이탈리아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권용준 안토니오(한국디지털대학교 교수)

 

르네상스 초기의 화가로 보티첼리나 필리피노 리피 등의 거장에 가려져 그 재능을 뒤늦게 인정받은 사람이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jo, 1449-1494년)이다. 그는 주로 프레스코화를 그렸으나, 그의 사실적이고 세밀한 기법, 시류에 민감한 풍속화적 성향은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던 다른 거장들의 그늘에 가려졌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그의 작품이 지닌 사실성의 특성을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20세기 중반이 지나면서 그의 독창적 필치를 인정받음으로써 15세기 피렌체의 으뜸가는 화가로 명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의 화가 수업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의 아버지가 금은세공사로, 아버지의 가게에서 도제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를란다요, 곧 ‘꽃장식가’라는 별명도 이때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 별명이 보여주듯 사실성과 세밀함을 기반으로 한 그의 독자적인 화풍이 유감없이 드러난 작품이 ‘최후의 만찬’이다.

 

‘최후의 만찬’은 복음의 주요 주제로 역대의 많은 화가들이 다루었으며, 특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기를란다요의 작품은 여러 면에서 동적 구조를 지닌 다 빈치의 것과 큰 대조를 보인다. 기를란다요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정돈된 실내 분위기에 안정된 구도와 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언뜻 보면 아주 성스런 순간을 그린 것 같은데, 기를란다요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도록 이끄는 많은 상징성을 주입시켜 놓았다.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곳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의 식당이다. 피렌체의 지도자 가문이었던 메디치 가문이 희사한 건축자금으로 지어졌으며, 화성(畵聖)으로 부르는 프라 안젤리코가 한때 원장으로 봉직했던 이 수도원은 당시 피렌체 사람들에게 신앙과 예술의 조화에 심취할 수 있는 각별한 공간이었다. 이 공간의 식당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은 미사 때뿐 아니라 식사시간에도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내 피의 잔이다.” 하는 성찬축성을 기억하고, 늘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함께하는 감격을 느끼며, 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 것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 그림은 일상적인 벽화 형식으로 긴 식탁에 일직선으로 앉은 제자들이 있고, 그 위로 하늘에 새들이 나는 풍경이 보이는 2중적인 구조로 되어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의 모습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는 달리 여유롭고 풍부한 재력을 가진 사람들로 보인다. 이는 이 제자들의 모델이 그 당시 피렌체의 정신적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최후의 만찬’이라는 성경의 사건은 신앙의 사건일 뿐 아니라 늘 우리의 마음에 재현되어야 할 ‘오늘의 사건’임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주님과 제자들이 함께한 고급 식탁과 그 위의 포도주와 잔, 집기류, 음식 등이 전혀 소홀함 없이 정돈되어 준비된 것이 완벽하게 보인다. 이 자리가 주님을 우리에게 주시는 자리이기에 그 성스러움을 이렇게 완전한 모습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깔끔한 식탁의 중앙에 만찬의 주인공 예수님이 있다. 정황으로 보아 예수님은 지금 막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고, 이 말씀에 대해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던 그 순간의 표정을 보이고 있다. 예수님의 왼편에는 어깨에 기댄 이가 있는데, 그는 베드로의 고갯짓에 예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요한이다. 그는 주님께서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13,21-26)라는 말씀에 너무 놀라 그분의 가슴에 쓰러지고 있다.

 

‘바로 그 사람’은 다른 제자들과 달리 식탁 앞으로 나와 앉은 사람으로,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김으로써 신앙공동체에서 쫓겨난 유다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나란히 할 수 없기에 다른 편에 홀로 앉아있으며, 머리 뒤에 성인의 후광도 없다.

 

지금 이 유다가 주님이 주시는 빵을 받으려 오른손을 뻗고 있다. 그런데 빵을 내미는 주님의 손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축복의 손인 반면, 그 빵을 받는 유다의 손은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고 신앙을 버리는 죽음의 손이 아닌가? 그의 뒤쪽 바닥에 앉은 고양이는 그 속성상 배반의 상징인데, 한편 유다의 속마음을 상징하지만, 다른 한편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언제나 변할 수 있는 우리 마음의 신앙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림의 오른쪽 끝에는 주님의 말씀에 너무 놀라 “주님, 저는 아니지요?”라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제자 필립보의 인간적인 모습이 보인다. 그 왼편의 식탁을 응시하는 제자는 손을 내린 채 이미 이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다는 듯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필립보의 손이 나약한 인간의 신앙에 대한 증거라면, 다른 제자의 손은 주님의 제사에 동참할 강한 의지의 손이다. 곧 그의 포개진 두 손은 포도주 병에 가려졌는데, 그 포도주가 우리에게 주실 주님의 피를 의미하는 만큼 주님의 사랑에 목숨을 걸고 보답하겠다는 조용하면서도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베드로이다. 지금 그는 배반의 음모를 듣고는, 주님에 대한 변치 않는 믿음을 약조한다는 ‘믿지 못할’ 각오에 들떠 눈을 부릅뜨고 오른손에 칼을 움켜쥐고 있다. 그 옆의 제자는 포도주 잔을 이미 비웠다.

 

이는 주님이 주신 잔을 받아 마심으로써 주님과 한뜻으로 주님의 길을 동반하겠다는 마음의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빈 잔 바닥의 남은 포도주는 붉고 둥근 모습인데, 이는 이 제자가 주님과 함께하면서 써야 할 순교의 월계관을 암시한다.

 

그리고 식탁에는 버찌들이 늘어져 있는데, 이 버찌는 한편 십자가에서 주님이 흘려야 할 수난의 피이며, 다른 한편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천국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둘의 모습은 그림 상단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벽 가운데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과 창을 통해 보이는 정원의 모습들이 그것이다.

 

하늘의 모습을 보면 오른편에 식탁의 제자들을 응시하는 공작새가 있다. 이는 불멸의 상징으로, 예수께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7,58) 하신 말을 상기시킨다. 공작새 앞의 비둘기 세 마리는 성령으로, 이런 믿음을 증언하시는 하느님을 상징한다. 비둘기의 모습이 아직 어린 것은 더욱 성숙해야 할 우리 믿음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공중을 나는 꿩은 부활을 의미하며, 매는 밀밭에 둥지를 틀기에 믿음의 상징이고, 검은 방울새는 가시덩굴에 둥지를 마련한다는 뜻에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다름이 아니다. 이런 수난과 믿음과 부활의 여정은 곧 하느님의 섭리이며, 하느님의 나라로 가고자 겪어야 하는 과정임을 창밖의 세상, 천국의 이미지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식당의 벽면을 장식한 이 ‘최후의 만찬’은 수도자들에게 강한 신앙과 앞서 경험하는 천국의 모습으로 다가왔을 것이며, 일반 관객들에게는 현세에서 느끼는 천국의 아름다운 모습, 곧 내가 가야 할 그곳을 위해 신앙과 믿음의 정열을 다지는 마음의 성소였을 것이다.

 


 

권용준 안토니오 - 문학박사. 한국디지털대학교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다.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와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