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하르먼스존 판 레인(네덜란드)
렘브란트 하르먼스존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년-1669년)은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이다. 일반적으로 그는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판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네덜란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이기도 하다.[1] 예술 분야에서, 그의 기여는 역사가들이 소위 네덜란드 황금 시대라고 부르는 시대를 불러오게 하였다.
생애 렘브란트는 1606년 7월 15일 암스테르담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레이던에서 방아간 주인의 아홉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가톨릭 신자이고,렘브란트는 개신교 신자였다.렘브란트는 화가가 되었을 때에 모친이 성서를 읽는 모습을 그림에 담아냄으로써 신심이 진지한 모친에 대한 존경을 보였다. 라틴어를 가르치던 학교를 나온 후, 렘브란트는 14세에 레이던 대학교에 입학 하였다. 렘브란트가 학교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림 그리는 일에만 열중하자, 그의 부모는 야콥 판 스바넨뷔르흐(Jacob van Swanenburgh) 밑에서 3년간 미술 수업을 받게 하였다.
1625년 개인 화실을 연 직후,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하던 피테르 라스트만(Pieter Lastman)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지도를 받으면서 미술에 관한 시야를 넓혔으며, 이를 계기로 1632년 거처를 암스테르담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때 외과 의사 조합의 주문으로 <툴프 박사의 해부>를 제작하여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1642년 〈야경〉을 제작하였으나, 그 당시에는 극히 나쁜 평을 받아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을 잃었다. 게다가 같은 해에 아내마저 죽자, 실망과 곤궁에 빠지게 되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작품에 정열을 기울였다. 1656년 파산 선고로 유대인 지구에서 가난에 시달리는 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을 계속 발표하였다. 끼니마저 굶는 만년의 비참한 삶에서도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그림을 제작하였다. 하지만 〈야경〉제작 이후 무너진 그의 화가로서의 삶은 끝끝내 회복되지 못했고, 결국 1669년 암스테르담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주요 작품 ○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 (1632년) - 마우리스하위츠, 헤이그 ○ 돌다리가 있는 풍경 (1637년) - 레이크스 미술관, 암스테르담 ○ 야경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 (1642년) - 레이크스 미술관, 암스테르담 ○ 세 개의 십자가 (1653년) - 국립도서관, 파리 ○ 밧세바 (1654년) - 루브르 박물관, 파리
작품의 특징 유화, 동판화 (에칭), 드로잉 작품들이 남겨져 있고, 자화상을 특히 많이 그렸다.
그는 네덜란드 최고의 화가로 그의 굳은 신념은 두터운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특히 종교화에 있어서 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가 남긴 작품 수는 유화·수채화·동판화·데생 등을 포함하여 2천여 점이나 된다. 성서·신화·역사·풍경·풍속·위인 등 각 방면에서 광범위하게 소재를 구하였다.
그의 작품은 그 대상에 대하여는 사실적 수법을 쓴 다른 네덜란드 파의 화가와 다름이 없으나, 빛의 효과에 있어서는 색채 및 명암의 대조를 강조함으로써 의도하는 회화적 효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결과로 그는 '근대적 명암의 시조'란 이름을 듣게 되었다. 또 그는 북부 유럽 동판화의 대가로서 약 300점의 걸작을 남겼으며, 이 동판화만으로도 그는 세계 미술 사상 최대의 화가로 인정된다.
에스파냐의 벨라스케스와 벨기에의 루벤스와 함께 17세기 최대의 화가로 손꼽히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유럽 회화 역사상 가장 훌륭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작품으로 <자화상> <마리아의 죽음> <성 가족> 등 많은 걸작을 남겼다.
렘브란트의 그림의 특징은 시대의 관행을 뛰어넘어, 개성을 발휘했다는데 있다. 이를테면 야경의 경우 얼굴이 모두 나온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그림도 있는데, 이는 모두 얼굴이 나오게 하는 단체 인물화가들의 관행을 뛰어넘은 것이다. 성서를 주제로 한 성화들도 성화(이콘)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하고 거룩한 느낌 대신, 인물들의 심리를 담아내는 심리묘사가 특징이다. 이를테면 구약성서의 족장설화 중 하나인 아브라함이 첩 하갈과의 사이에서 낳은 큰 아들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를 버리는 장면을 그림으로 묘사하면서, 아브라함의 고뇌와 정실부인인 사라의 뿌듯함을 아브라함은 고뇌하는 표정을 짓고, 사라는 숨어서 웃는 모습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특히, 1822년 그의 작품중 22세의 자화상을 처음 접한 요한 폰 괴테는, 이 작품을 보고 젊은시절 꿈을 접어 우울과 방황의 나날을 보냈던 자신을 상기시키며 "꿈을 포기하는 젊은이는 생명이 없는 시신과 같으니 살아가지 않느니만 못하다" 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후,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편찬했다고 전해지며, 이 작품 속에 수록되었던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훗날 독일 청년들의 모방자살 "베르테르 효과"의 방아쇠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작품
갈릴래아 호수의 폭풍과 그리스도,유화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c. 1669
야경(〈The Night Watch〉) 원제 :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The Militia Company of Captain Frans Banning Cocq〉), 1642. 캔버스에 유화.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 1631
자화상
1628년 경 젊은 렘브란트, 22세. 부분적으로 명암의 대조를 연습함 en:chiaroscuro. 알테 마이스터 미술관. 드레스덴.
1628년 경 좀 더 활기찬 모습, 최근에 재발견됨.
1632년의 렘브란트, 그는 이 때 이런 스타일로 최신 유행을 이끄는 성공한 초상화가이었다.
"칼을 지닌 동양권력자로서의 자화상"-역할극, 에칭, 1634.
"문지방에 기대어 있는 자화상", 에칭, 1639
1640, 100년 전 복고풍 의상을 입은 모습. 내셔널 갤러리 (런던)
자화상, 캔버스에 유화, 1652년. 비엔나의 쿤치스토리체스 박물관 (en: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비엔나 1655년 무렵, 호두나무 판에 유화, 크기 줄임.
렘브란트 — 자화상, 1659?, 에든버러.
Self Portrait with Beret and Turned-Up Collar, 1659. National Gallery of Art, 워싱턴, D.C.
Self Portrait with Two Circles, 1660. Kenwood House, 런던
1669년, 그가 죽던 해, 다른 자화상에 비해서 훨씬 나이 들어 보임. 내셔널 갤러리 (런던),
렘브란트의 집
렘브란트의 집(네덜란드어: Museum het Rembrandthuis)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으며, 렘브란트가 1639년부터 1660년까지 살았던 집이다. 유태인 거주 지역인 요덴브레이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1911년 이후로 렘브란트 박물관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이곳에는 그의 원본 에칭과 유품, 그의 스승과 제자들의 작품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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