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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교회사

사도후(使徒後)시대의 교회(Ⅰ)

by 파스칼바이런 2012. 7. 23.

 

사도후(使徒後)시대의 교회(Ⅰ)

 

 

사도교부(使徒敎父)

 

사도후시대(使徒後時代)는 일반적으로 2세기 전반을 지칭하고 있다. 이는 계시의 사도시대가 끝나고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후세대에 전해준 특징을 지닌 시대로서 사도들과 후대 교회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성전(聖傳)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대의 저술가 그룹을 "사도교부"라고 부르고 여기서 "사도교부시대"라는 명칭도 나왔다. 이들은 사도들과 면식(面識)이 있는 제자들이거나 문하생들, 혹은 사도들과 개인적인 친교를 없었다고 하더라도 사도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이 그룹에 속하지 않는다.

 

사도 교부로서 로마의 클레멘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뽈리까르뽀, 헤르마스, 빠삐아스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이외에 연대적으로나 내용에 있어서 사도시대에 밀접한 저서들의 저자들도 사도교부에서 다루고 있다. 예컨대 「디오네토에게 보낸 편지」, 「바르나바의 편지」, 「디다케」, 「코린토 인들에게 보낸 편지」등의 저자들이다. 이러한 사도교부들의 저서들은 초기 교회의 사상, 관습, 생활을 알아보는 데에 더없이 귀중한 가치를 지닌 문헌들이다.

 

이 문헌들은 처음에 카리스마적 정신으로 지배되었던 사도들의 공동체가 어떻게 제도적 성격을 띤 교회가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또한 신약성서의 정경(正經)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밝혀준다. 이 저서들 중에 어떤 것은 처음에는 신약성서로 간주되어 계시된 신앙의 정경으로 취급되거나 전례에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사도교부들 자신에 의해서 영감(靈感)이란 개념이 규정된 후에는 신약성서와 분리되었다.

 

교회전례(敎會典禮)

 

사도후시대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아직도 유대교의 배경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따라서 교회관습은 유대교적, 또는 유대인 그리스도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교회관습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입교의식과 주일집회였다.

 

그리스도교 입교의식 :   세례를 위한  준비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별로 없지만 이는 매우 오래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세례준비에는 두 단계가 있었다. 우선 개종을 원하는 이는 교육을 받고, 다음에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깨달아 믿고 신도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그는 준비기간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교육은 교리교육과 윤리교육을 말한다. 교리교육의 내용은 창조주인 하느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 및 구약 예언의 성취 등이었다.

 

이러한 교리교육은 바오로 사도의 서한이나 초기 교부들의 저서에 있는 옛 신조들을 요약한 것으로 이 신조들은 최초의 신경을 이루었고, 여기서 오늘날 우리의 사도신경이 발전되어 나온 것이다. 윤리교육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계명, 그리스도교 신도의 생활방법, 그리고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정한  법에 의한 규율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육이 끝난 다음에는 세례예절이 있었다. 이 예절 이전에 세례 지원자들은 단식을 실천하였는데 이는 구마(驅魔)와 같은 결과 ―마귀를 끊음과 그리스도에게의 신봉― 를 내던 것로 보인다. 단식 외에 안수(按手)가 있었고 곧 세례예절이 시작되었다. 이 예절은 간접적으로는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 직접적으로는 세자 요한의 세례, 최종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와 연결되었다. 세례는 샘물에 세 번 침수함으로써 이루어졌는데 이는 천주성삼을 불러내는 것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죄의 사함과 성령의 은혜를 갖고 오는  것이었다.

 

침수 후에 몇 가지 부수적 예절이 따랐다. 십자 모양으로 축성된 기름을  바르는 예절이 있었는데 이는 유대인 그리스도교 사상의 흔적으로 십자 표시는 본래 히브리어로 하느님 이름의 상징을 의미하였다. 이 예절은 세례 자체를 뜻할 만큼 매우 중요하였다. 그리고 흰 옷을 입는 예절이 있었고, 동정자들에 한해서 나뭇잎으로 엮은 관을 쓰고, 세례수를 마시고 우유와 꿀을 먹는 예절 등도 있었다.

 

성서예식이 끝난 다음에는 세례 후의 교육이 있었다. 세례는 보통은 빠스카 전야에  있었기 때문에 이 교육은 빠스카 설교의 형식을 갖고 있었다.  이는 유대인들이 에집트에서 나올 때의 그들의 해방에 대한 이야기(haggadah)를 대체한 것이다. 이 설교 후에는  회식(會食)이 따랐는데 이는 유대교의 빠스카 식사를 대체한 것이다. 여기에는 세 번의 감사기도, 즉 포도주에 대한 기도, 빵에 대한 기도, 그리고 식사 후의 기도가 있었다.

 

성찬례의 거행으로 빠스카 전야는 끝난다. 우리는 이 시대의 성찬전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문헌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빠스카 식사중에 세워진  것으로 보여진다. 빵과 포도주에 대한 축성의 기도는 유대교의 축복 형식에서 취한 것으로 성찬례는 유대교 예절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주일집회 :   신약성서와 사도후시대의 저서들은 주일집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사도 20,7; 디다케 ⅩⅣ, 1; 바르나바의 편지 ⅩⅤ,9). 이 저서들에 의하면  신도들은 주의 날(주일) 동이 트기 전에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빵을 나누기 위해 함께 모여 감사하였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안식일 의식 거행을 나무라면서 주일을 준수할 것을 적극 옹호하였다(마네시아 인들에게 보낸 편지 Ⅸ, 1). 그리고 이 주일집회 이전에 고백 또는 참회예절이 있었다(디다케 Ⅳ, 14; 바르나바의 편지 ⅩⅨ,12). 주일집회는 복음서와, 바오로 사도나  클레멘스 등의 편지들과 같은 저서들의 낭독으로 시작되었고 이러한 예전적 독서 후에 설교가 있었다. 교회의 중요한 지향을 위한 기도가 있은 다음에 성찬기도가 신도들의 아멘이란 답으로 끝났다.(1고린 16,2).

 

주일에 대한 명칭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이는 그 기원을 우리에게 암시하여주고 있다. 첫째로 가장 오래된 것은 「디다케」에서 발견되는 ‘주의 날'(Kyriake)이다. 이 단어는 처음에 그리스도교의 부활절을 의미하였다.

둘째로 주일은 ‘제8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바르나바의 편지 ⅩⅤ,9). 신도들은 유대교의 제7일을 지낸 후에 다음날 동이 틀  때까지 그들 고유의 예전을 거행하였는데 이는 유대인 그리스도교에서 기원하였다.

 

세째로 천지창조와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시켜 ’첫째 날‘ 로 지칭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은 매우  중요안 첫째 날이었기 때문에 모든 주일도 역시 첫째 날로 불리었다. 주일 이외에 수요일과 금요일은 그리스도교의 단식일이었고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계속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다.

 

유대교 축제일 :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유대교 축제일을 계속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유대교 달력은 여러가지가 있었고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사용한 달력도 이런 다양한 것 중의 하나였다. 더우기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축일은 유대교 축제일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지낸 유대교 축제일들은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갖고 재현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