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년 5월 21일 ~ 1910년 9월 2일)
프랑스의 화가'
앙리 루소. 1902년.
앙리 루소(Henri Rousseau)는 가난한 배관공의 자제로, 프랑스 마옌 데파르트망(Department) 라발에서 태어났다. 전문적인 미술 교육 없이, 파리 세관에서 세관원으로 근무하며 49세가 되어서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독학으로 주말마다 그림을 그렸기에 ‘일요화가’의 대명사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미술을 시작한 이 시기에 르 두아니에(Le Douanier:세관원)란 애칭을 얻게 되었다.
1885년부터 살롱 드 샹젤리제에 2점의 작품을 출품한 이후 1886년 이후는 앙데팡당전과 살롱 도톤에 출품하였다.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그가 독학으로 미술을 시작했다는 것과 어색한 인체 비례, 환상과 사실의 색다른 조합 등의 이유로 조소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사후에 《경악(驚愕:숲속의 폭풍)》(1891) 《잠자는 집시》(1897) 《뱀을 부리는 여인》(1907) 《시인의 영감》(1909)과 같은 그의 그림은 참신성과 원시적인 자연스러움을 근거로 높이 평가되었다. 그의 원시림과 같은 원초적인 세계에 대한 동경과 환상성, 강렬한 색채는 현대예술의 거장 피카소, 아폴리네르 등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성장 배경
그는 프랑스 마옌의 라발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앙제에 있는 법률사무소에서 일했다. 20세 때 지원병으로 육군에 입대하여 군악대에서 클라리넷 연주자로 근무, 안지애에 주둔한 51보병 연대음악대에서 복무했다. 이때 그가 미술에 특별한 재능을 나타내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 복무 5년째 되던 해 부친이 사망하여 제대하였고, 파리에서 모친과 함께 살며 서기로 있다가 71년 첫 번째 아내 클레망스의 연고지에서 파리시 입시세관(入市稅關) 직원이 되었다. 이때 르 두아니에(Le Douanier:세관원) 루소 라는 별명 혹은 애칭을 얻게 된다. 이후 25년간 세관원 생활을 계속하다가, 49세가 되던 해에 그림만을 그리기 위해 스스로 나온다. 루소는 매달 받는 연금 50프랑만으로는 생활을 해나갈 수가 없어 공예 학교에 나가 소묘도 가르치고 그의 화실에서 아이들에게 음악과 그림을 가르치는 등 여러 가지 일에 종사했다.
루소는 가난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행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25세 때 10년 아래인 15세의 크레망스와 결혼하여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그 중 다섯 명이 죽고 크레망스마저 1888년 34세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0여 년 동안을 부인 없이 지낸 루소는 55세 때인 1899년 미망인인 조세핀누와 재혼했는데 조세핀누 역시, 4년 후인 1903년에 사망하고 만다. 루소는 1890년에 그린 (나 자신, 초상 : 풍경)이란 작품 팔레트 뒷면에 이 두 여인의 이름을 써 넣어 먼저 간 크레망스를 추모하고, 재혼한 조세핀누의 건강을 빌었다.
Myself: Portrait-Landscape
1890 / Oil on canvas, 143 x 110 cm
Narodni Galerie, Prague
〈나 자신〉, 앙리 루소의 자화상, 1890년. 프라하 국립미술관
본격적인 작품 활동의 시작
1880년경부터 그림을 그렸다고 추정되는데, 당시의 관학파(官學派)인 제롬, 클레망 등을 존경하였다고 한다. 그의 작품 <행복한 콰르테트>(1902)는 제롬의 <순결>에서, 그리고 <잠자는 집시의 여인>(1897)도 제롬의 <두 사람의 왕>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1884년 루브르 미술관에 나가 옛 대가들의 그림을 모사하였다. 그는 미술관에 의해 모사증을 받았는데, 이를 몹시 자랑스럽게 여겼다. 85년 이후부터는 열정적으로 전시회에 참여하는데, 살롱 드 샹젤리제에 2점의 작품을 출품한 것을 시초로 1905년부터는 3년에 걸쳐 계속 살롱 도톤에 출품하였다. 1886년부터는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했다. 앙데팡당전에의 출품은 1899년, 1900년 두 해를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때 고갱, 르동, 쇠라 등과 친교를 맺었다. 93년에는 세관을 퇴직하고 가난한 연금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아이들에게 음악과 그림을 가르치는 사숙(私塾)을 개설, 가르치면서 그림에 전념했다.
이듬해인 94년 앵데팡당전에 출품한 《전쟁》(파리 오르세미술관)은 최초의 대표작품이 되었으며, 97년의 《잠자는 집시 여자》(뉴욕 근대 미술관)로 이어졌다. 루소가 그리는 주제는 파리지앵의 일상생활·초상·정물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있었지만 가장 루소적인 세계가 되는, 이국정서성, 신비적 상징성에 가득 찬 밀림을 주제로 하는 작품은 1903년의 《호랑이에게 피습당한 척후(斥候)》에서 시작되며, 1907년의 걸작 《뱀을 다루는 여자》로 전개되었다.
이들 작품에는 순진무구한 정신에 의해서 포착한 소박한 영상이 참신한 조형질서에 따라 감동적으로 나타나 있어, 현대의 원시적 예술의 아버지라 불릴 수 있는 하나의 전형(典型)을 엿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재혼한 조세핀을 잃었고, 여전히 빈곤 속에 지내면서 괴로운 사랑의 연속, 환(換)사기사건에 말려들어 재판을 받는 일들이 있었으나 시인 아폴리네르를 비롯해서 R.들로네·P.피카소 등과 알게 되었고, 후에 소박파라는 명칭으로 일요화가들을 세상에 소 개하게 된 비평가 W. 우데 등과도 알게 되었다.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1909, 바젤 미술관)》는 아폴리네르의 호의있는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다. 아폴리네르와 그의 애인 마리 로랑생을 그린 이 그림은 아폴리네를 루소를 돕기 위해 무려 5만 프랑을 지불했다고 전한다. 피카소 등의 호의는 단순히 인간미 있는 노화가(老畵家)에 대한 선의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물을 단순화하여, 명확하고 구성적인 구도를 가진 루소의 세계에서 20세기가 필요로 하는 소박함과 큐비즘에 통하는 명확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작품은 사실과 환상을 교차시킨 독특한 것이어서 초기에는 사람들의 조소를 받았다. 1905년경부터 피카소, 아폴리네르, 우데 등이 그의 작품에 주목하여 평가하기 시작하였으나, 그에 대한 실질적인 평가는 그의 사후에 이루어졌다. 루소는 발의 괴저(壞疽)로 인해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