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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복음] 사순 제2주일 - "여기에 초막을 짓겠습니다"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7.

[생활속의 복음] 사순 제2주일 - "여기에 초막을 짓겠습니다"

임상만 신부(서울대교구 상도동본당 주임)

가톨릭평화신문 2020.03.08 발행 [1554호]

 

 

▲ 임상만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는데,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눈이 부시게 변하였다는 내용이다.

 

예수님의 변모 장면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예수님의 생애에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기 직전까지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당신의 모든 활동을 끝내시고 앞으로 있을 수난과 죽음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후 바로 이루신 첫 행보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수난의 길을 걸으셨다. 그러기에 이 변모 장면은 그 자체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특히 이 일이 당신의 수난 예고로 이어지는 상황에 더 깊이 주목해야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타보르 산에 오르시기 직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5-16)라고 대답한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정말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은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새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말씀을 반복하시자(마태 16,21), 그는 충격에 빠지게 된다.

 

이런 절망적 상황 속에서 베드로가 목격한 장면, 즉 타보르 산에서 예수님께서 빛처럼 귀하게 변하신 모습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베드로에게 ‘그럼 그렇지!’ 하는 확신을 다시금 갖게 했고, 순간 들뜬 마음을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베드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리야와 모세에게 거는 정치적, 종교적 기대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해 예수님께서 백성들이 바라는 영웅적이고 화려한 인물로 우뚝 서기를 바라는 속내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하늘의 소리가 들리면서 베드로의 환상은 깨끗하게 깨진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이것은 ‘너희의 환상과 기대를 위해 그곳에 초막을 짓고 머무를 것이 아니라 즉시 산 아래로 내려가서 부활을 향한 수난 속에 자신을 던질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라’는 명령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고, 산 아래 지상의 삶에서 각자가 수난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누구도 영원한 생명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신의 인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시점의 산에 서 있게 된다. 계속 머무르고 싶은 성공한 사람의 모습으로, 한 부분도 내어주기 아까운 가진 자의 모습으로 혹은 자기 마음껏 갑질할 수 있는 권력자의 모습으로 영원히 머무르고 싶고, 그 마음으로 초막을 짓고 싶은 순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곳은 자기 자신의 타보르 산, 모든 욕심과 환상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으로 온전히 변화되어 내려와야 할 기회의 산이기도 하다. 우리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을 다 버리고 수난의 현장으로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빛의 길이며 부활의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며 사순 시기의 여정을 이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초막이 아니라 현실에서 그분과 함께 머물 때만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