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16주일 -그냥 내버려 두어라 임상만 신부(서울대교구 상도동본당 주임) 가톨릭평화신문 2020.07.19 발행 [1573호]
▲ 임상만 신부
얼마 전 성모상 화단을 새로 정리하며 꽃잔디와 화초를 예쁘게 심었다. 한 달 남짓 지나자 심지도 않은 잡초들이 화초보다 훨씬 많고 싱싱하게 자라고 있기에 날을 잡아 잡초 제거를 한 적이 있다. 특히 요즘처럼 비가 자주 오는 여름에는 잡초를 잠시만 내버려두어도 화단을 뒤덮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잡초는 눈에 보이는 대로 뽑아내는 게 부지런한 일꾼의 올바른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우려하는 주인의 염려도 이해 못 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농사를 잘 지으려면 어린 곡식이 일부 손상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잡초를 제거해야 한다. 이렇게 농사의 효율성만 본다면 잡초를 놔두는 주인이 틀렸고 죄다 뽑아내는 일꾼들이 옳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밀과 가라지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밀은 자라서 사람의 양식으로 이용되지만 가라지는 단지 사람들의 양식이 되지 못하는 것 뿐이기에 가라지가 악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만 곡식으로서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잡초가 하나같이 인간에게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는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어제까지 쓸모없다고 버렸던 잡초의 효능이 밝혀져서 약초로서 귀한 대접을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선과 악으로 나누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다름의 차원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때때로 우리가 악으로 규정하여 이를 근절하려던 시도 자체가 사실상 더 큰 악이 되었던 일이 많다. 악한 인종 청소를 위한 홀로코스트의 가스실이 그랬고, 어떤 시대이건 있었던 마녀사냥이 그랬다. 가깝게는 삼청교육대 같은 ‘인간 개조 교육’의 경우 등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가라지는악으로 규정하여 제거의 대상으로만 보거나, 가라지를 개량해서 밀로 만들고자 해서는 안 된다. 밀과가라지는 서로 다른 나름의 존재성을 가지고 함께 공존해야 하는것이기에, 예수님께서“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3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선과 악의 구별은 오직 하느님께만 유보되어 있고 그분께서 추수 때에 결정하실 일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보여지는 부분만이 아니라 그의 내면을 보심으로써 악인으로 단죄받은 세관장 자캐오에게서 관대함을 끄집어내셨고, 막달라 마리아의 부정한 삶 속에서도 신앙의 큰 사랑을 드러내셨음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라는 예수님의 관점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회복할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평화를 얻을 수 있다. 바오로 사도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로마 7,13)라는 말씀처럼, 우리 속에도 선뿐만 아니라 악도 있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사는 것 이외에 내세울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선하다고 하지 않으셨는데(루카 18,19) 하물며 우리가 어떤 선의 잣대로 대상을 악으로 규정하여 단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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