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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및 지식>/◈ 건 강 관 련

김영찬 시인 / 불멸을 꽃 피운 시, 나의 시인에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0. 20.

김영찬 시인 / 불멸을 꽃 피운 시, 나의 시인에게

 

 

  시는 유리창 박살내는 광풍(狂風)일 수 있으되 고요히

  눈 깜빡이는 가로등이어야 하고

  시는 심해를 물결치는 물고기의 발광체(發光體) 은비늘일 수 있으되

  등줄기에 물을 뿜는 고래의 심호흡(深呼吸)이어야 하고

  시는 짙푸른 녹음에 놀라 질겁하고 날아오르는 새의 비상(飛翔)이어야 하되

  수풀에 길을 더듬는 뱀의 낮은 포복(匍腹)이어야 하고

  시는 침묵에 값하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 죄 암담한 모순에

  오히려 빛나야 하고 주술사의 주술에 귀동냥,

  범상(犯上)* 속의 적막(寂寞)을 캐낸

 

  고요에 몸을 던진 절체절명의 파멸(破滅)이거나

  불가능을 향한 자유혼 그 자체이어야 한다

 

  인간의 통박으로는 도무지 잔머리 굴려서 도달(到達)할 수 없는 저 곳,

  불가사의한 임계(臨界)에 깃발 꽂고 서있는

  당신은 누구, 정말로 멀쩡한가?

 

계간 『애지』 2013년 봄호 발표

 

 


 

 

김영찬 시인 / 아낭케(anatkh), 밤의 피크닉상자를 열고

 

 

어떤 밤은 어떤 밤의 피크닉상자를 끼고 덜거덕 덜거덕 졸면서

산음승흥(山陰乘興)

산음에 흥겨워

스웨기(swaggie) 스웨거링(swaggering)

아흐렛날 흩어진 달빛 아래

흘러갈 뿐이다

 

이런 날

이티비티 티니위니 비터브 타임(itty bitty teenie weenie bit of time)

흥진이반(興盡而反)이면 뭘 어떻고

 

뜬금없는

 

스웩(swag)

스웨기(swaggie)

스웨거(swagger)들의 실력 없는 거들먹거림

 

밤을 모르는 부랑아들은 아무도 모르는 밤에 아무 것도 모르지 단지

 

밤을 좋아해야할 이유를 묵살하고

아, 아낭케(ANATKH)

밤에

밤의 블랙박스를 발로 걷어차며 삐뚤삐뚤 걷는다

걷다가 허풍쟁이와 만나면 밤길에

최대한의 허장성세

가령 자투리 시간까지 빈 술병 비워내는 간다르바(gandharva),

건달바(乾達婆)들의 핑계 좋은 일탈

살찐 엉덩이만 흔든다

 

이런 때 나는 각촉부시(刻燭賦詩)

 

불현 듯 모든 걸 차치하고 사타구니에 불길 솟는 기분

마이아스트라(Maiastra)에 황금빛 날개를 접은 ‘금의 새’처럼 웅크리고

포란(抱卵)하는 시를 쓴다

 

교령회(交靈會)의 스마우그(Smaug the Golden)들처럼 SF무대를 단박에

장악하는 시

     그래, 세상을 제멋대로 내 맘 대로 재구성해야 직성이 풀리지

     아마도, 아마 느그들 뜻대로 그렇게 되진 않겠지

     그렇게는 안 될 거야, 아마도 아마

     느그들 멋대로

 

홀대받는 외지인 포가니(Pogany)는 루마니아 태생

그녀의 촌스럽게 쪽진 머리 시뇽(chignon)의 정결함, 절박한 상황에도

두 손 모은 숭고미

나는 왜 그토록 염결한 초절주의에

둔감했을까

조타수 없는 방향타

 

그대 위해 언제든 랜덤액세스(random access)가 가능토록 도와다오

그대 울타리 너머 들장미가 만발하듯이

그대 밤의 영역에 쌓이는 사사로운 고독감의 피로에

나도 물들고 싶다

노에시스 - 노에마?

농담이시겠지

노에시스(noesis)(의식작용: 노에마가 일시 정주(dwell)하는 과정)

노에마(noema)(의식의 지향점: 결과)에

주사위를 던진

상제나비(swallowtail butterfly)에게는 공유개념이라는 게 없다

그렇잖고, 사랑의 대피소란 서로에게

무의미 한 것

가령 귀소본능 없이도 마카로니웨스턴 영화필름 속에 올연(兀然)한

총성이 캉 캉 캉

황야의 어둠을 뚫고 방점만 찍을 뿐

 

건방지게 휘어진 콧수염을 과시하며 존 업다이크는 오늘밤에도

공복에 9시 반의 당구를 칠 것이다

나는 가끔 내 각촉부시의 습작 관행에

달의 서쪽

바람의 동쪽을 분명히 선 그은 다음 머릿속을 휑하게

빈터로 비워둔다

 

자유방임 무방비로 방종해도 될 때를 가정하면

동고비는 알을 낳고

두꺼비는 두껍두껍 논두렁을 뛰어넘어도 아무 상관없잖은가

그러므로 허리 아픈 체위란 무모한 짓

허드렛일 치고는 체력소모가 아깝더라도 하찮은 벌레 한 마리라도

허리 다치지 않게

배려하는 마음이 곧 천국이다

 

소심한 자이나교도들은 밤길에 무거운 피크닉상자 대신

가벼운 빗자루만 들고

길바닥을 쓸며 조심조심 장도에 오른다

 

그래, 우린 자이나교도가 아니지

 

칼을 찬 나는 피크닉상자를 들고 웃체다 와다(uccheda vada), 단멸론자로서

아나크(anarch)

아나키(anarchy)

아나키스트(anarchist)만의 고집스런 행보

아낭케(ANATKH)의 신성을 위하여

물벼락이라도 맞을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빅토르 뚜르비아노는 평화를 위한 조건 없는 대안

(절대로 그는 시를 쓰지 않았다)

우주의 고요함에 값비싼 향수를 뿌리는 대신

질문 없이도 가능한

대답

프라나(prana) 호흡법을 전수시켰지

 

흰 개의 꼬리와 흰개미의 더듬이 기능을 둘 다 갖춘

한 여인의 행적이

사라진 풍경 속에 되살아난다

그러면 뭐가 달라지는가?

누군가는 이 시간

개목거리를 들고 어둠의 골짜기에 들어간 뒤

나오지 않는다

 

그때부터 나는 여인과 흰 개 중 어느 쪽이 행간에 잘 숨어

비유로 풀리는지

결과를 보기도 전에 산음(山蔭)에 승흥(乘興)

밤의 테라스에 외등을 켜둔다

 

빛나는 밤의 소격효과(疏隔效果)와 시의 안녕을 위한 등업

패스워드(password)를 바꾸고

id를 변경한 피크닉상자 속에서 밤은 거대한 귓불

늘어뜨린다

 

계간 『무학청춘』 2020년 가을호 발표

 

 


 

김영찬 시인

충남 연기에서 출생. 외국어대 프랑스語과 졸업. 2002년 《문학마당》과 2003년 《정신과 표현》에 작품들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불멸을 힐끗 쳐다보다』와 『투투섬에 안 간 이유』가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