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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경 관 련

[생활속의 복음]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by 파스칼바이런 2021. 5. 31.

[생활속의 복음]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살아내야 할 신비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가톨릭평화신문 2021.05.30 발행 [1615호]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지체는 기본적으로 서로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희생하는 ‘사랑의 원리’ 안에서 어우러져 살아갑니다. 그런데 가끔 ‘돌연변이’ 같은 녀석이 생겨날 때가 있습니다. 그 녀석은 다른 지체들로부터 양분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내어주지는 않습니다. 그 녀석이 점점 커져 몸 전체를 잠식하면 다른 지체들이 병들어 약해지고 결국엔 모두가 죽음에 이릅니다. 우리는 그 녀석을 ‘암세포’라고 부르지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암적인 존재’들이 많습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며, 오직 제 욕심을 채우겠다는 일념으로 살아가는 ‘욕망의 화신’들입니다. 그들로 인해 지금 우리 사회는 오해와 갈등, 시기와 질투, 증오와 분노로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기념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암세포를 치유하고 사랑의 원리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원리 안에서 깊은 일치를 이루셨습니다. 성부는 성자에게 당신의 권한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성자는 성부에게 당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시어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당신의 이끄심에 따라 사는 이들을 아버지께로 모아들이시고 모든 영광을 그분께 돌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을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고 믿어 고백하며, 세 위격이 이루고 계신 ‘사랑의 일치’ 안에 참여하고 싶다는 바람과 의지를 마음속에 되새기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쉽고 편한 것만 찾는 나태함에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려는’ 나약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좋을 때만’ 상대방과 함께하려 드는 반쪽짜리 마음으로는 완전한 사랑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 온 뒤 땅이 더 굳어지듯, 고난과 역경을 함께 이겨낸 용사들에게 끈끈한 ‘전우애’가 생기듯,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음으로써,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따라오는 수고와 괴로움을 기꺼이 참아 받음으로써, 하느님과 우리 사이 신뢰의 유대가 더 견고해질 것이며, 사랑의 일치는 더 단단해질 것입니다. 그런 신뢰와 사랑 속에서 우리는 점점 하느님을 닮은 자녀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지요.

 

사랑의 일치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해야 할 의무가 주어집니다. 하느님의 목소리에 항상 귀를 기울이며 그분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을 기억하고 실천하며,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 뜻에 맞는 옳은 길을 선택하기 위해 한결같이 노력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용서와 이해가, 평화와 행복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복된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삼위일체’는 머리로 이해해야 할 복잡하고 어려운 신학개념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살아내야 할 신비입니다.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사는 사람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과 관심으로 돌보아 줍니다. 형제를 안쓰럽게 여기며 이해와 용서로 그들을 끌어안습니다. 그렇게 이웃 형제자매와 일치를 이룰수록, 우리가 하느님과 맺는 일치가 더 깊고 단단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하느님을 이용하여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함으로써 그분 사랑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