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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경 관 련

[생활속의 복음] 고통과 시련 중에 함께하시는 분

by 파스칼바이런 2021. 6. 21.

[생활속의 복음] 고통과 시련 중에 함께하시는 분

연중 제12주일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가톨릭평화신문 2021.06.20 발행 [1618호]

 

 

 

 

누군가와 어려운 일을 함께해야 할 때 흔히 ‘한 배를 탄 운명’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과 내가 운명을 함께하는 ‘공동체’로서 서로 힘을 합쳐 고통과 시련을 함께 극복해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은 ‘예수님과 한 배를 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깨닫지 못한 듯합니다. 그렇기에 거센 돌풍 앞에서 지레 겁을 먹고 혼비백산해서는 자기들이 죽게 생겼는데 가만히 계실 거냐고 예수님을 닦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은 다 예수님의 계획안에 있었습니다. 배에 타고 있다가도 내려서 머물 곳을 찾아야 할 시간에, 낮에도 바람이 거세지면 위험한 호수를 캄캄한 어둠 속에서 건너자고 하신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굳건한 믿음 안에 머무르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시려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제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주님께서 가자고 하시니 따릅니다. 주님과 같이 가는 길이니 날이 좀 어두워도 별일 없을 거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상과 달리 주님께서 한 배에 계시는데도 위험이 닥칩니다. 원래 신앙인의 삶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위험과 고통이 피해갈 거라 기대하지만, 기대는 무너지고 말지요. 주님은 위험과 고통을 막아주시는 분이 아니라, 위험과 고통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함께 계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제자들에게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배에 물까지 들이차는 그 난리 통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십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무신다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 신뢰에 대해 시편 작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자리에 들자마자 단잠이 깊사오니 든든히 살게 하심 홀로 주님 덕이오이다.”(시편 4,9)

 

예수님께서는 전적으로 아버지를 신뢰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아직 당신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해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잠들어 있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고, 헛된 꿈속을 헤매며 자기가 바라는 것을 예수님으로부터 얻으려고만 했던 그들이야말로 신앙적으로 잠든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깨어나야 할 사람도 그들이었습니다. 거센 돌풍 따위 한 말씀으로 잠재우실 능력의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 주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지 못하는 약한 믿음에서 깨어나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정신이 번쩍 들도록 깨우시고자 거센 풍랑으로 뒤흔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려달라고 난리를 치는 제자들에게 진정하라고 호통을 치십니다.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고,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고통’과 ‘시련’은 참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님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축복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겪지 않고 탄탄대로만 걷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걸어야 할 길은 좁고 험할지라도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길입니다. 주님은 우리보다 먼저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고,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한편, 우리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믿음에 대해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비록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시편 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