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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경 관 련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 야곱 I (창세 25,19-35,29)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 야곱 I (창세 25,19-35,29)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고대 근동의 현인들에게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적절한 때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코헬렛은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라고 말하면서, 인생에는 정해진 때가 있고 그것을 결정하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라 고백합니다(코헬 3,1-15). 성조 야곱의 삶은 바로 이 ‘때’를 올바로 기다리지 못해 고난을 겪었던 시절과, ‘때’를 기다리며 하느님을 신뢰하는 성조로 살아간 시절로 나누어집니다. 이러한 야곱의 삶은 우리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지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시는”(1코린 1,28) 하느님은 이미 모태에서 작은아들 야곱을 자유로이 택하셨습니다(창세 25,23). 장차 하느님의 백성을 그의 이름을 따서 “이스라엘”(창세 32,29) 그리고 “야곱 집안”(탈출 19,3; 이사 2,5; 루카 1,33)이라 부르게 될 만큼, 위대한 성조로서의 삶이 야곱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한 젊은 시절의 야곱은 전형적인 찬탈자였습니다. 형 에사우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태어난 후로(창세 25,26), 허기진 형을 꾀어 맏아들 권리를 넘기겠다 맹세하게 하고(창세 25,29-34), 연로한 아버지를 속여 하느님의 축복을 훔친(창세 27,1-29) ‘영리한 사기꾼’일 뿐이었지요. 사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때’를 준비하며 기다리지 못한 것은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저 관습대로 맏아들 에사우에게 축복을 전하려 한 아버지 이사악, 야곱의 운명을 알면서도 기다리지 못해 그를 부추긴 어머니 레베카, 하느님의 축복을 업신여긴 형 에사우, 모두가 하느님의 뜻과 상관없이 제 뜻대로만 행동할 때, 가정의 평화와 일치는 무너져버렸습니다. 시련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머물며 준비하지 못한 자신에게서 오는 법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제 살길만 찾아 도망치던 야곱에게,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리라 약속하시며 ‘기다림’의 덕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창세 28,10-22). 이후로도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속고 이용당하는 20년이란 세월 속에서, 하느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삶을 묵묵히 배워나갔지요. 마침내 야곱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상식과 예상을 뛰어넘는 온전히 자유로운 분임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분 안에서 깨어 준비하는 것임을 배웠고, 그렇게 더 이상 ‘뒷발꿈치 야곱’이 아닌 ‘성조 야곱’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은 기다림이 아닐까 합니다. 수동적이고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하느님을 희망하길 지치지 않는 삶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그 ‘때’를 알지는 못해도 그 ‘때’를 정해 두셨음을 믿기에, 나의 완성을 또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의 완성을 깨어 기다리며 부단히 준비하는 삶에 우리 구원의 길이 있겠지요.

 

마침내 야곱은 맏이가 아닌 넷째 유다에게 장자의 축복을 전하는 혜안을 지닌 성조가 되었고(창세 49,8-12), 바로 그 유다 가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셨음을 기억합니다. 우리도 설레는 마음으로 매일 하느님과의 만남의 ‘때’를 잘 기다리고 맞이하면서, 구원을 잉태하는 날들을 이어가길 희망합니다.

 

[2021년 7월 25일 연중 제17주일 대구주보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