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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미카엘의 순례일기] (57) 하느님과의 작은 약속 하나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8.

[미카엘의 순례일기] (57) 하느님과의 작은 약속 하나

순례가 끝난 뒤 진정한 순례는 시작된다

김원창(미카엘, 가톨릭 성지순례 전문가)

가톨릭평화신문 2022.03.06 발행 [1652호]

 

 

 

▲ 성지순례는 예수님과 성인성녀들의 자취를 좇는 과정이다. 한국 성지순례단이 프랑스 라살라트 성모 발현지에서 기도하고 있다.

 

 

코로나가 전 세계를 강타한 지 햇수로 3년 차가 되어갑니다. 이제는 또 다른 유행병처럼 여겨야 한다는 의견이 커지면서, 관광 사업에 의존하는 국가의 경제적 문제도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입출국을 엄격히 제한하던 나라들까지도 하나둘씩 국경을 개방하고, 국제선 항공 운항을 재개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순례에 대한 문의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곧 마음껏 순례할 수 있는 시간이 올 테지요. 하지만 순례란 무엇보다도, 순례가 끝난 그 후의 일상을 위한 것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지도 신부님의 제안으로, 순례단 모두가 하느님과의 작은 약속을 메모지에 적어 봉헌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앞으로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그 약속이 꼭 지켜지기를 바라는 지향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메모지들은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신부님의 책상 위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순례를 함께하셨던 한 형제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매일 복음 말씀을 읽겠다고 메모지에 쓰셨다가, 그마저도 지킬 수 없을까 봐 대신 그날의 복음이 쓰인 페이지를 찾아 책상 위에 펼쳐놓겠다고 고쳐 쓰신 분이었습니다. 그때 했던 약속에 대해 물으니, 형제님께서는 즐거운 웃음을 지으셨습니다.

 

“사실 저는 주일 미사도 자주 빼먹는 신자였어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조그만 약속을 해놓고 나니, 그것만큼은 꼭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일단 성경을 사무실로 가져가 책상에 놓고는 출근하자마자 그날의 복음을 찾아 펴놓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제게 결재받을 서류를 들고 온 직원들이 펼쳐진 성경을 보면서 여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신자인 줄 몰랐다고 말하는 이가 많았습니다. 어릴 때 세례를 받았지만 성당에 안 간 지 오래되었다는 말을 꺼내는 직원도 있었고요. 한 번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며칠이 지났는데, 직원 한 명이 ‘지난주와 같은 페이지네요’라고 말해 준 적이 있었죠. 창피한 마음에 성경을 아예 치워버릴까 생각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아예 10분 일찍 출근하기로 했어요. 펴놓은 복음을 읽고 주모경도 바치기로 했죠. 세상에, 10분 일찍 출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라요. 하하.”

 

“그렇게 한두 달이 지나고 나니 제가 아주 열심한 가톨릭 신자로 소문이 나버렸어요. 한번은 식사 전에 꼭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개신교 신자 직원이 고개를 들더니 나를 쳐다보는 거예요. ‘국장님은 기도 하지 않으시냐’는 표정이었어요. 그 후로는 십자성호를 긋고 식사 전후 기도를 해야 했죠. 부서장 회식을 하던 날에는, ‘국장님께서는 금요일에 고기를 못 드시니 회식은 목요일에 합시다’라고 먼저 제안해주더라고요. 무신론자인 직원이 제가 지켜야 할 것을 대신 알려준 셈이에요. 작은 약속 하나를 지키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직장에서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그 변화는 결국 제 가정과 성당에서의 삶까지 영향을 끼쳤지요. 어느 날 아내가 ‘당신, 참 많이 변했어요. 미사에 참여하는 자세부터 달라졌어요’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약속을 잘못해서 그래요’ 하고 웃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작은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이 점차 나 자신을 변하게 하네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평생 활동했던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 1885년~1968년) 신부님께서는 “성당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기도하며 구원을 기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신자들에게 다리를 꼬고 앉아 기도하라 시켜도 그러지 않을 테지요. 하지만 설령 그런 삼가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해도, 행동(형식)에 담긴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먼저 그렇게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모든 ‘형식’에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성당 안에서 바른 자세로 앉으면 비딱하게 앉았을 때보다 진실한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웃으면 행복해진다’는 말처럼, 먼저 행동을 바꾸면 어느새 그 마음까지도 변하게 되니까요.

 

성지순례도 그러한 ‘형식’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예수님과 성인 성녀들의 자취를 좇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신앙이 변화하는 것, 그리고 그 변화를 순례가 끝난 이후의 삶까지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야말로 성지순례라는 체험이 주는 가장 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