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의 순례일기] (59) 하느님의 집으로 올라가는 마음 수많은 계단을 오르며 온몸으로 느끼는 신앙 김원창(미카엘, 가톨릭 성지순례 전문가) 가톨릭평화신문 2022.03.20 발행 [1654호]
▲ 자유도, 희망도, 평등도 없던 시대의 민중들은 아름다운 성당을 보며 천국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사진은 포르투갈 봉 제수스 두 몬테 성당.
유럽의 대성당을 순례하다 보면, 그 규모와 웅장함, 화려함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동시에 의문이 들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인구도 많지 않았을 텐데 이토록 큰 성당이 필요했을까?’, ‘가난했던 민중의 삶에 비해 너무나 화려한 성당이 오히려 하느님과 신앙인의 사이를 멀어지게 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중세 시대의 문맹률은 무려 95%에 이르렀습니다. 귀족이나 학자가 아닌 대다수 사람들은 글을 읽기는커녕 책을 구경하기도 어려웠습니다. 15세기에 구텐베르크가 금속 활판 인쇄술을 발명하기 전까지 모든 출판은 필사로 이루어졌던 데다, 책은 고사하고 종이 자체가 귀한 시대였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글이나 책을 대신해서 종교의 교리와 신앙의 원리를 이해해주는 다양한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그 시대의 신앙인들은 평생 가난하고 비참한 현실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자유도, 평등도, 희망도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들이 가진 유일한 희망은 천국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천국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바로 성당이었습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성당을 보며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에 위로를 받았던 것이죠.
물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이 결코 이런 물질적인 화려함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중세의 신앙인보다 성숙한 신앙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잣대로 그 시대의 것을 평가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글조차 읽을 수 없는 이들을 위해서 성당 벽면에 이토록 정교한 성경의 구절을 조각해놓았고, 대를 초월한 모든 성인의 통공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성인상을 만들었으며, 높고 위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저토록 아름다운 장미창을 설계했지요. 순례 중 마주치는 풍경을 그 시대를 살아갔던 신앙인의 눈으로 보려 한다면, 더욱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의 신자들이라면 포르투갈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파티마를 떠올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파티마를 제외하고도 포르투갈에는 순례할 곳이 아주 많습니다. 포르투갈 속담에 “코임브라에서 공부하고 포르투에서 일하라. 리스본에서 돈을 벌고 인생의 마지막은 브라가에서 기도하며 보내라”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포르투갈은 도시의 특색이 분명한 나라인데, 개중 브라가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종교적인 분위기를 가졌습니다.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은 봉 제수스 두 몬테(Bom Jesus do Monte)입니다. ‘산 위에 있는 선한 예수 성당’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성당은 계단이 많기로도 유명해서, 노약자를 위해 계단 옆에 푸니쿨라를 설치하였습니다. 간혹 순례자 중에도 이 궤도열차를 이용해 성당을 순례하려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저는 꼭 걸어 올라가도록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 성당을 향해 걸으며 그 시절의 신자가 어떤 마음으로 성당을 향해 걸어갔을지 묵상하자고 권합니다.
성당 입구까지는 여러 차례 구부러진 오솔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야 합니다. 길이 구부러진 곳마다 작은 경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경당은 모두 주님의 수난과 관련된 곳입니다. 닫힌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안을 들여다보면, 나를 위해 수난을 당하시는 모습이 조각된 예수상을 바라보며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걸어 올라가면 일렬로 늘어선 백여 개의 계단을 만나게 됩니다. 그 계단은 다섯 번에 걸쳐 좌우로 교차하여 오르내리도록 만들어져 있고, 다섯 번의 교차점에는 분수가 하나씩 마련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오감을 상징하는 그곳에서 성당을 오르는 우리는 눈, 코, 귀, 입 그리고 나의 몸을 씻습니다. 보고 냄새 맡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나의 오감을 하나씩 씻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해야 하며,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나의 오감(五感)을 하나씩 정화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글을 읽지 못했던 그 시대의 신앙인에게 이 길은 하느님의 집으로 나아갈 때 어떤 마음이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교리 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비록 교리서를 읽을 수 없더라도 신앙의 의미를 온몸으로 느끼려 했던 예전의 신앙인들처럼, 봉 제수스 성당의 그 길을 침묵으로 걸으며 기도하는 시간이 어서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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