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의 순례일기] (60) 나만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진정한 성찰이란 김원창(미카엘, 가톨릭 성지순례 전문가) 가톨릭평화신문 2022.03.27 발행 [1655호]
▲ 사순 시기,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자신을 성찰하며 살아간다면 더욱 기쁜 마음으로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이탈리아 토리노의 성 요한 주교좌 성당에 있는 성의(聖衣) 앞에서 기도하는 순례자들.
사순 시기가 돌아온 만큼, 판공성사를 준비하고 계시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기회를 통해 깊은 성찰과 회개를 하고 하느님과 화해하며 신앙을 돌아보려는 마음이 들게 마련이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 판공성사 대기 줄은 매일매일 늘어만 가지요.
제가 존경하는 신부님 한 분께서는 본당 판공성사를 준비하시는 동안 가능한 한 많은 손님 신부님을 초대하십니다. 서너 명의 신부님께서는 보통의 판공성사처럼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신자에게 성사를 베풀도록, 또 다른 서너 명의 신부님께서는 좀 더 긴 시간 동안 영적인 상담과 함께하는 성사를 베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신부님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사목자로 불림 받은 사람이니, 신자들이 원하는 다양한 요구를 알아내려고 노력해. 한 가지 일을 하더라도 여러 가지 방법을 준비하려고 하지. 내 사목 방향의 기준은 우리 본당 모든 식구가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 그게 다야. 만약 우리 신자들이 새벽 4시 나 밤 10시에 주일 미사가 필요하다고 하면, 나는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할 거야.”
신부님의 이런 노력 덕분인지, 본당에서 판공성사를 베풀 때면 영적 상담과 함께하는 긴 화해 성사를 원하는 분이 점점 더 많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순례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대화를 많이 나누게 됩니다. 자신이 가진 어려움에 대해 같이 기도해주시길 청하시는 분도 계시고,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원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리고 흔치 않은 경우지만, 자신을 뽐내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탈리아 순례 때의 일입니다. 한 형제님께서 첫날부터 제게 자주 이야기를 걸어오셨습니다. 처음에는 친근함의 표시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형제님은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그리고 그를 통해 얼마나 부를 쌓았는지를 드러내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분은 첫날부터 식사 때마다 모두를 위해 포도주를 구매하셨고, 또 휴게소에 들리면 아이스크림이나 커피를 잔뜩 사라면서 제게 100유로 지폐를 건네곤 하셨지요. 한 사람씩 돌아가며 마실 것을 나누는 경우는 많지만 이렇게 한 분이 계속 돈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며칠이 지나자 저를 포함해 여러 순례자가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님은 부담 갖지 말라는 말만 반복하셨습니다.
사실 다른 분들이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그런 행동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도 그것이 온전히 타인을 위한 선행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형제님은 식당에 모두가 앉고 나면 꼭 웨이터를 불러서 큰 소리로 “와인! 와인 쓰리 보틀. 굿 와인으로 줘!”라는, 영어도 아니고 한국말도 아닌 주문을 하면서 바로 돈을 꺼내 웨이터 손에 쥐여주었습니다. 버스가 휴게소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제게 돈을 주셨고요. 간혹 성물 판매소에 들르면 항상 제일 크고 비싼 성물을 사셨는데, “원래 이런 걸 하나씩 사줘야 해. 집에 똑같은 게 많지만, 뭐 내가 필요해서 사는 건가? 성물 파느라고 고생하는 수녀님들 용돈 드린다고 생각하는 거지” 하고 꼭 뒷말을 붙이셨습니다. 순례자들은 곧 형제님이 아프리카에 열 개의 우물을 팠다는 사실과 모 성당을 지을 때 엄청난 양의 성물을 봉헌했다는 사실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죠. 결국, 지도 신부님께서 강론 중에 “명색이 지도 신부인데 저도 포도주 한잔 대접해야죠. 게다가 저를 통해서 모두를 위해 써달라고 작은 성의를 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계속 한 분만 선행을 베풀어서야 되겠어요?”라고 말씀하신 후에야 순례단을 위한 형제님의 베풂(?)은 그치게 되었습니다.
형제님의 자랑(?)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졌습니다. 순례가 마무리되고 공항으로 이동하며 한 사람씩 짧은 소감을 이야기하는 시간, 형제님은 “이탈리아가 볼거리는 많았지만,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 나라라고 해서 기대하고 왔는데, 열흘 동안 제가 타는 차보다 좋은 차는 한 번도 못 봤네요. 길거리도 지저분하고…. 사람들이 게으른가 봐요.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고, 그래서인지 하느님께서 복을 주셨어요. 하느님께 다시 한 번 감사함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시며 순례를 마무리하셨습니다.
두 분의 차이는 단지 한 분은 신부님이고 다른 한 분은 평신도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또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진정으로 희생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찰하며 살아간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하느님께서 알아주시겠지요. 사순 시기,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지난 일 년의 기준을 다시 점검하고 다듬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
[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 하느님의 구원경륜⑭ ‘인간생태’ 재건에 대한 결론 관계 안에서 응답할 때 완성되는 ‘하느님 사랑’ 가톨릭평화신문 2022.03.27 발행 [1655호]
▲ 「사목헌장」은 인간 존엄성이 빼어난 이유가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도록 부름을 받은 인간 소명에 있다고 전한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작 ‘사도들을 부르심’.
한 포기 작은 풀일지라도/ 그것이 살아 있으면/ 비에 젖지 않나니 더구나 잎이 넓은/ 군자풍의 파초임에랴/ 빗방울을 데불고 논다 한 마리의 집오리일지라도/ 그것이 살아 있으면/ 물에 젖지 않나니 더구나 몸가짐이 우아한/ 왕비 같은 백조임에랴/ 물살을 가르고 논다 (지조 / 황명걸)
‘지조’라는 시에서 시인은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한 포기의 작은 풀이나 한 마리의 집오리라도 살아 있으면 비와 물에 젖지 않는다고 노래한다. 요컨대 하찮은 생명체라 하더라도 생명체 나름대로 각기 고유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더군다나 작은 풀이나 집오리보다 우아한 모습을 지닌 파초나 백조는 자기 정체성 유지에만 머물지 않고 유유자적한 자연계의 아름다움, 즉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까지 한다.
이렇게 자연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자연스레 이루어지고 있지만,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럽지도 쉽지도 않다. 그 이유는 지난 연재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이 겸손을 잃고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하느님께 죄를 범하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은 하느님의 집(모상)으로써 근원적인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하느님의 모상(집)을 재건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구원경륜’을 펼치셨다. 하느님께서 펼친 구원경륜의 핵심은 당신 외아들을 이 세상에 파견하시어 이루신 ‘환희의 신비’, ‘빛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심으로 인간이 하느님처럼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처럼 가정에서 생활하시며 직업을 가지고 일상을 사심으로써 우리도 일상생활을 통해 하느님의 거룩함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죄를 씻어버리고 하느님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과 허무를 물리치셨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우리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우리에게 베푸신 이 모든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계명을 잘 지키고, 선행을 많이 해서 얻게 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신 은총의 선물이다. 이러한 사랑 덕분에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인간 본래의 정체성이 회복되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마태 5,48)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완전함’의 세계로 초대하신다. 요컨대 ‘하느님의 모상’ 회복에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의 완성인 ‘완전함’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완전함의 길은 바로 관계 안에서 사랑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사목헌장」에서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성으로 초대받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 존엄성이 빼어난 이유는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도록 부름을 받은 인간의 소명에 있다.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과 대화하도록 초대를 받는다.”(19항)
‘관계 안에서 응답’할 때 하느님의 사랑은 완성되어 간다. 결혼한 사람들은 어떤 순간이 가장 행복한지를 상상해 본다. 아마도 신혼생활을 지내면서 사랑의 열매로 첫 아이를 출산할 때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때 신혼부부들은 사랑과 생명의 신비를 체험할 것이다. 태어난 후 몇 주간 동안 아기는 그저 본능적으로만 반응하다가 차츰 아빠를 알아보기 시작한다. 아빠와 눈을 맞추고, 어르면 까르륵거리며 좋아한다. 아기가 점점 자라 혼자서 과자를 집어 먹을 만큼 되면, 아빠는 아이 입에 과자를 넣어 주기도 하고 아이가 아빠 입에 과자를 넣어주며 서로 친밀한 소통이 이루어진다. 특히 아이가 아빠 입에 과자 하나를 넣어 주는 순간, 기쁨이 온 집안을 가득 채운다. 아빠는 아기가 넣어주는 과자 하나에 왜 이토록 행복해하며 감동할까? 그 자그마한 과자 하나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길래! 그 이유는 바로 아이가 아버지의 사랑에 응답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렇게 응답을 통해 깊어지고 커지고 우리 가슴을 적셔주고 삶의 의미를 체험케 하는 말로 설명되기 어려운 신비이다. 사랑은 우리 노력으로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응답하는 관계 안에서 발생되는 ‘생명의 불’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사랑에 응답하여 그 사랑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릴 때, 사랑은 완성에 이른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그것에 응답하는 관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얻고 또 얻어 차고 넘치게”(요한 10,10) 해 주신다. 요컨대, 사랑에로의 부르심과 응답 안에서 우리의 생명력은 더욱 풍성해진다. 하느님께 받은 은혜에 대해, 진심 어린 기도나 찬미로 응답하며 되돌릴 때,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소중한 것들, 나의 재능이나 재물 등을 보상을 바라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께 되돌리는 마음으로 나눌 때, 그리고 우리에게 닥친 여러 시련이나 불운을 하느님께 희생의 예물로 봉헌할 때, 전혀 예기치 못한 사랑의 불꽃이 피어나 우리에게 그 사랑이 차고 넘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인간생태’인 우리 영혼이 재건될 때 우리는 에덴동산의 축복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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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향기 with CaFF] (155)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탈북 천재 수학자의 비밀 수업 가톨릭평화신문 2022.03.27 발행 [1655호]
개봉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이 영화를 소개하는 것은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최근 개봉작 중 어른과 청소년이 다 함께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좋은 영화라, 아직 보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소개한다.
탈북자 이학성은 전국 상위 1%만 입학할 수 있다는 동훈고에서 경비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학생들 사이에서 인민군이라 불리는 그는 실은 천재라고 불렸던 북한 최고의 수학자이다. 반면 사회배려자 전형으로 동훈고에 입학해 다니고 있는 한지우는 학우들과의 경쟁에서 밀려 성적은 하위권에 수학은 거의 포기 상태이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사교육을 받지 못하는 사이 성적은 점점 떨어지고,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일반고 전학 권유까지 받게 된다.
이 두 주인공은 우연한 계기로 서로 엮이게 되고, 학성은 세 가지 조건으로 지우에게 수학을 가르치게 된다. 그 조건 중 하나는 시험 성적과 관련 없이 수학만을 가르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수업으로 지우는 성적을 올리기 위한 수학이 아니라 학문으로서의 수학을 배우게 된다. 전자는 출제자가 원하는 정답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시되는 반면, 후자는 문제 자체와 그 풀이 과정이 중요시된다. 학성은 중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답을 찾는 ‘과정’이고, ‘잘못된 문제에서는 올바른 답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지우에게 가르친다.
그렇게 수개월 동안 학성에게 수학을 배운 지우는 눈에 띄게 수학 성적이 올랐지만, 시험 문제 유출 사건을 계기로 누명을 쓰고 강제 전학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학성의 개인 교습을 외부에 알리지 않겠다는 또 하나의 조건 때문에, 수학 성적이 오른 이유가 부정한 방법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학교에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 알게 된 학성은 고민 끝에 학자이자 교육자이자 어른으로서의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된다.
이 영화를 통해 성찰하게 되는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진정한 어른의 가치이다. 자라나는 세대를 이끌어 줄 지혜로운 멘토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삶의 본질을 파악하여 중요한 것, 좋은 것,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전할 줄 아는 어른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둘째는 교육자가 가진 삶의 태도의 중요성이다.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스스로 살아내지 못하는 교육자는 피교육자에게 절대로 양질의 교육을 할 수 없다. 셋째는 실수를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행동의 중요성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이 이미 몸소 보여주신 것들이 아닌가. 오래간만에 이러한 복음적 가치를 맛볼 수 있는 영화를 원한다면 이 영화를 강력히 추천한다.
3월 9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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