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랑 시인 / 네트의 뉘앙스 불편해, 그래서 너와 함께 복식을 구성할 수 없어 패배와 승리의 기분 또한 내 것이 아니잖아 셔틀콕을 쫓아가는 본능 때문에 그저 우리가 되었을 뿐이야 그러니까 내 옆을 서성이는 것 말고 스텝 바이 스텝, 나에게 멀어질 방법을 궁리해봐 손의 감각으로 아슬아슬한 높이를 사랑하는 건 위험해 내가 움츠리는 건 반칙이니까 후회는 선을 넘지 못한 아주 미미한 수치로 판가름 날 거야 날렵함에 집중하며 점프를 끌어 올려봐 내 키는 늘 고만고만하니까 오래 다진 순발력은 오늘에 대한 진지한 태도겠지 바닥에 널브러진 발자국들의 환영을, 훅 치고 들어오는 스매싱 같은 타인의 시선을 열심히 연기할 필요는 없어 우리의 태도는 딱 거기까지야 관계 말고 관심 말고 관성만을 떠올려 너는 처음부터 저쪽에 더 마음을 두고 있었으니까 계간 『시와 소금』 2021년 가을호 발표 최영랑 시인 / 넌 기린이 될 수 없어 꿈이 잠을 당기는 걸까 잠이 꿈을 당기는 걸까 흩어지지도 않고 악착같이 뭉쳐지는 장면들, 저녁의 횡단보도 앞의 나와, 아침의 횡단보도 건너편의 내가 섞인다 나는 왜 이곳에서 서성이고 있었던 걸까 뒤돌아보니 따라 건너지 못한 내 그림자와 기린 한 마리가 급브레이크 자동차 앞에 서 있다 나의 비명이 모스부호처럼 속도에 감겨들고 파열된 얼룩무늬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키 작은 기린처럼 내가 슬프게 웃는다 여전히 그림자를 질러가는 자동차들, 나는 자꾸만 발돋움을 하는데 내가 점점 작아진다 신호등 앞에서 붉은색도 초록색도 아닌 점멸되는 건너편을 망연히 바라본다 ‘넌 기린이 될 수 없어.’속삭임 같은 환청이 들린다 몽롱한 아침이 눈을 뜬다 키 큰 그림자와 키 작은 내가 겹쳐진다 이젠 악몽에게 솔직해져야 할까 하이힐의 감정을 좀 더 끌어 올려야 할까 또 다시 시작된 아침 8시, 넘쳐나는 생각들이 바쁘게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나만 혼자 꿈속에 서 있는 것 같다 비명 속 얼룩무늬가 자꾸 복사되고 있다 나다운 나는 어떤 그림자 속에 존재하는 걸까 계간 『창작21』 2021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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