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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경 관 련

[말씀묵상]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4.

[말씀묵상]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제1독서 사도 5,12-16 / 제2독서 묵시1,9-11ㄴ,12-13,17-19

복음 요한 20,19-31

가톨릭신문 2022-04-24 [제3291호, 19면]

 

 

십자가 죽음이라는 고통 거치시며

인내하고 순명해 부활하신 예수님

사랑 실천해 숭고한 의미 되살리길

 

 

 

마티아 프레티 ‘의심하는 토마스’ (1656~1660년).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할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넣어봤다는 표현은 없지만, 그의 성격상 끝까지 세심하게 확인해봤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그분의 옆구리에 직접 넣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런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 28) 토마스의 늦었지만 장엄한 신앙 고백 앞에 예수님께서는 각별한 말씀 한마디를 덧붙이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너무나도 특별한 사건이었기에 당시 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 공동체에 주어졌던 가장 큰 과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활 사건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전대미문의 대사건이었기에,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역시 부활 사건 앞에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말을 걸어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돌아가시기 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똑같은 자상한 얼굴로 불안과 공포에 떠는 우리를 안심시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지니고 계신 절대불변의 속성, 극진한 사랑을 먼저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을 통해 당신의 부활이 참됨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 찬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극적인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두 번 다시 보기조차 싫은 십자가의 상흔, 손과 발에 뚫린 대못 구멍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극진한 노력 앞에 제자들은 의혹의 시선을 거두어들입니다. 스승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 앞에 너무나 기뻐 어쩔 줄 모릅니다.

 

우리들의 나약한 신앙을 굳게 하시려고, 흔들리는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주시려고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시는 부활 예수님이십니다. 머리로만, 지성으로만, 논리로만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신비는 항상 베일에 가려져 있기 마련입니다.

 

진정으로 부활을 믿고, 느끼고,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매일 매 순간이 부활일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절정인 예수님의 부활

 

의심 많은 토마스 사도의 회심, 믿음의 회복 스토리는 초대교회 때부터 오늘날까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교육하기 위한 교과서이자 지침 역할을 해왔습니다. 사실 토마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3년 세월 동안 그분과 동고동락해왔으며, 여러 차례 당신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육받았습니다. 그런 제자조차도 의심했던 것을 봐서, 초대교회의 수많은 그리스도 신자들도 부활에 대한 의혹이 컸던 것이 자명합니다.

 

오늘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기간 고민하고, 예비자 교리에 등록하고, 마침내 그리스도 신자로서 새로운 출발을 한 신자들, 그리고 신앙의 연륜이 깊은 교우들에게, 부활 사건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는가 물었을 때,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사실 부활은 교회 수많은 축일 가운데 가장 등급이 높은 대축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 그리스도교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활 없이 그리스도교는 없습니다. 부활 없이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부활 없이 구원도, 하느님 나라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토록 그분의 부활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이자 진수가 되는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 신앙의 초석인 부활 사건 앞에 별 감흥이 없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라고 합니다. 부활 사건 앞에 밋밋한 사람들, 심드렁한 사람들, 대체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타성에 빠진 신앙생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뼈를 깎는 쇄신 작업이 필요한데, 그러한 고통스런 과정을 외면해서 그렇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도 부활이란 당신 인생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십자가 죽음이란 고통스런 과정을 거치셔야 했습니다. 정말 가고 싶지 않은 십자가 길을 끝까지 인내하며 순명하며 걸어간 그 결과가 영광스런 부활이었습니다. 결국 십자가 없이 부활의 참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극복 없이 부활의 영광은 없습니다.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니 예수님 부활을 온몸으로 느끼고, 예수님 부활의 영광에 깊이 참여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매일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을 기쁘게 참아내는 사람들, 자신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 시련이 다가올 때마다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을 따라 매사에 극도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분의 부활은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매일 죽는 사람들, 특히 자신의 죄에서 죽고, 이기심에서 죽고, 교만한 마음에서 죽는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실 은총은 정말 클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절정은 곧 예수님의 부활로 표현됩니다. 만일 그분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직도 죄와 어둠 속에 잠겨 있을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그분의 부활로 죽을 운명, 필멸(必滅)의 존재인 우리 역시 불사불멸의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니 눈만 뜨면 감사드려야 하고, 백 번 천 번 감사드려야 할 은총의 대 사건이 바로 그분의 부활입니다.

 

 


 

양승국 신부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는 1994년 사제품을 받고 영성신학 전공으로 로마 살레시오대학교를 졸업했다. 지금까지 서울 대림동 수도원 원장, 수련장 및 대전 정림동 수도원 원장, 서울 관구관 원장, 부관구장, 관구장 등을 역임해 왔다. 현재 태안 내리공동체 원장 겸 살레시오 피정센터 담당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