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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주성 시인 / 피세정념Ⅰ 避世靜念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10.

송주성 시인 / 피세정념避世靜念

 

 

 -신은 거울 앞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없네

 

 이제 얼굴만 남았다

 야릇한 얼굴 배시시 웃는 얼굴 눈 흘기는 얼굴

 침묵하는 얼굴 생각을 숨긴 얼굴 어금니를 꽉 깨문 얼굴

 눈을 부라리는 얼굴 눈을 찡그리는 얼굴 입술을 깨문 얼굴

 얼굴을 바라보는 얼굴 얼굴을 기다리는 얼굴 얼굴을 돌리는 얼굴 걸어갈 다리를 삼키고 들어 올릴 팔을 잘라 먹고 잡을 손도 내밀 손도 손가락 걸 손가락도 베어먹고 몸통과 허리와 등과 가슴을 삼켜버린

 오직 말과 얼굴이 내는 말과 내지를 말과 찌르는 말과 속삭일 말과 얼굴이 연주하는 노래와 비탄의 노래와 연애의 노래와 결의의 노래와 고독의 노래와 얼굴이 어느 틈으로 내는 휘파람 소리와 밥을 씹으며 손님을 부르는 소리와 이따금 내는 입버릇 소리들과

 들을 귀와 볼 눈과 표정들만

 닥치는 대로 세계를 집어삼킨

 땀구멍 하나가 분화구만 하고

 살주름 하나가 깊은 크레바스 같이

 한없이 부풀어오르는

 거대한 얼굴만

 

 


 

 

송주성 시인 / 피세정념 避世靜念

 

 

 내부의 붕괴속도가 빛과 소리의 탈출속도보다 빠른 곳을 블랙홀이라 한단다 내게 일어났던 그 많은 일들은 언제나 결과만 통지되고 이유가 전달된 적이 거의 없다 사건의 일부는, 또는 어떤 사건은 송두리째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오지 못한다 시간과 장소의 경계 안에 갇히는 것은 망각의 물질들이 아니라 모든 것의 부재, 우리의 결여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아 텅 비어 있는 장소 그 자체다

 주인공이 자신의 사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쓰지 않으면 누구도 모른다 당신은 언제나 망각 밖 어딘가에 있다 누구라도 하나 거기 남았어야 했을까 뭐라도 하나 남겨 놓고 왔어야 했을까 하지만 누가 거기 남아 있으려고 했을 것인가

 내부의 붕괴속도가 빛과 소리의 탈출속도보다 빠른 곳 당신이 할 말을 잃었던 시간들 속이다 말이 도착하기 이전에서 서성거렸던 몸 그리고 또다시 두려움에 떨며 당신의 말은 전진해야 할 저쪽 어두컴컴한 곳을 향해 차마 발을 내딛지 못한다 기쁨 사랑 누구의 죽음들 죄 고통 고마움 뭐든

 투명한 음악이 이제 막 들려오려고 할 때 그 직전에서 닫혀 버리는 곳 아직 이쪽으로 넘어오지 않은 어쩌면 끝끝내 이쪽으로 넘어오지 않을

 지금 또 지나간

 저편

 당신의

 

 


 

 

송주성 시인 / 피세정념 避世靜念

 

 

꽃병이 꽃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다

시가 떠나버린 밤의 공중에 시체의 향수가 진동한다

칼잡이가 비겁한 자들을 뒤쫓아가며 정의!”라고 외친다

엎어진 물에 흐르며 깨진 조각에 찔리며 부서진 꽃잎들의 소리로

노래 부르기는 얼마나 쉬운가 입만 벌리고 있으면 되지

한때는 벅찼을, 영광이었을 옛 젊은이들에게

세상에, 세상에, 는 아직 감탄사다

한때는 하늘이 무너져도 무너지지 말자는 약속이었을

겁쟁이들, 날마다 모여 추억하며 서로를 사랑하고

쫓기던 겁쟁이들, 지고만 있을 순 없지

우뚝 멈춰 서서 뒤쪽을 향해 용기를 내어

소리친다 뭐라굽쇼!”

익명의 도덕이 광장의 분수처럼 솟구치며

바깥이 체온보다 높아진다는 폭염의 날들을 기다리는

도덕적 개인 비도덕적 사회가 거꾸로 꽂혀 있는 책상 위에서

꽃병은 졸음에 겨워 꾸벅꾸벅 식은땀 흘리며 흔들렸겠지

버지니아 울프 씨는 이미 많은 잔의 술을 마셨지 않은가

지겨운 숙녀여, 목마에서 그만들 내려오시지

겁쟁이들을 이끌고 그대의 오백 파운드짜리 하우스로 가시든가

역사는 길 가는 아무나 멱살을 잡아끄는 폭력배이거나

가냘픈 몸으로 노래를 부르는 세이렌의 음성

나를 아세요? 그때도 지금도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일곱 나팔 소리도 없고 나를 위한 법률도 없는 곳에서

세상에, 세상에, 가 감탄사라니

자신의 무거운 꽃을 이고 쓰러지는 시인이여

폭풍 속에서 땅에 날개를 박는 새처럼

주먹으로 땅바닥을 쳐대는

언제나 최후의 질문을 들고 어쩔 줄 몰라

길거리를 떠도는 사람이여

나타나며 사라지고 사라지며 나타나는 바람의

길거리 저편에

시들어 딱딱한 꽃잎들 바스라질 듯 뒹구는

길거리 저편에

빛의 집 투명한 벽 높이

바람의 문이 깃발처럼 춤추며 번쩍이고 있지 않은가

 

 


 

송주성(宋周成) 시인

1985년 부산출생. 건국대 불문과 졸업. 건국대 국문과 박사과정수료. 199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나의 하염없는 바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