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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성가정 일군 신앙 선조들과그들의 삶의 자리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27.

성가정 일군 신앙 선조들과그들의 삶의 자리

성가정 성지에서 일깨우는 ‘가정 신앙 교육’의 중요성

가톨릭평화신문 2022.05.22 발행 [1663호]

 

 

 

▲ 의정부교구 마재 성지는 복자 정약종의 성가정 성지로 가정 안에서의 신앙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곳이다.

 

 

▲ 전주교구 초남이 성지는 한국 교회 첫 동정 부부가 생활한 곳으로 신앙의 씨앗을 뿌리는 곳이 가정임을 일깨워주는 곳이다.

 

 

“내 아들과 딸아…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고 어머니께 효의 도리를 다하는 데 힘을 쏟도록 하여라. 모든 사람을 상냥하게 사랑으로 대하고, 너희가 이 세상에서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는다면 너희는 당연히 천국에 오를 것이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부끄럽다만, 그러나 아비가 자식들을 선(善)으로 독려하는 게 나쁠 리 없을 터이다. …옛 어른들의 지혜로운 격언을 마음 깊이 새겨, 비록 가벼운 잘못이라도 절대로 저지르지 말며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선이라도 항상 힘써 행하여라.”

 

복자 이경언(바오로)이 순교를 앞두고 자녀들에게 보낸 옥중 서간이다. 박해 시대 신자 가정 안에서 어떤 신앙 교육이 구체적으로 행해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복자 이경언의 편지 내용처럼 신앙을 지키기 위한 꾸준한 가정 교육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박해 시기 3ㆍ4대에 걸쳐 한 집에서 지속해서 순교자들이 나오고 또 배교했다가 다시 교회로 돌아온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신자들이 항상 아침ㆍ저녁 기도와 묵주 기도를 했다”는 성 베르뇌 주교의 증언처럼 가정 안에서의 신앙 교육의 원천은 분명 ‘기도’일 것이다. 가정이 위기에 처한 오늘의 상황에서 가정을 바로 세우고 또 가정이 신앙의 못자리로 제 역할을 다하려면 가정 안에서의 신앙 교육, 특히 기도 생활이 일상화돼야 한다. 가정 복음화를 희망하며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성가정을 이룬 한국 교회 대표적인 가정과 그들의 삶의 자리 2곳을 소개한다.

 

신앙의 씨앗을 뿌리는 곳은 가정이다.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단지 신앙의 모범을 보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녀들에게 꾸준히 신앙을 권면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이를 통해 가정을 ‘성가정’으로 가꿔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권고하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상이다. 한국 교회 순교 성인과 복자들은 보편 교회 안에서도 보기 드물게 가족과 혈연으로 얽혀 있다. 글머리에서 밝힌 것처럼 우리 신앙 선조들이 가정 안에서의 신앙 교육을 그만큼 철저하게 행했다는 증거이다.

 

복자 정약종 가정과 마재 성지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인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 유조이(체칠리아)의 남편이며, 복자 정철상(가롤로)과 성 정하상(바오로), 성 정정혜(엘리사벳)의 아버지이다. 가족 모두가 순교자로 성인과 복자품에 올랐다. 정철상의 장인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처남 홍인(레오)도 순교 복자이다. 홍교만의 사촌 서(庶) 동생인 복자 홍익만(안토니오)은 복자 홍필주(필립보)의 장인으로 홍필주의 어머니인 복자 강완숙(골룸바)과는 사돈이 된다.

 

정약종이 가정을 어떻게 성가정으로 가꾸었는지는 그의 차남 정하상의 글에서 알 수 있다. “충효 두 글자는 만대가 흘러도 바꿀 수 없는 도입니다. 부모의 뜻과 몸을 봉양하는 것이 자식 된 자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천주교의 가르침을 받은 자는 더욱 근신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섬길 때 예를 다하고 봉양할 때 힘을 다 바칩니다. 그 정성스러운 마음이 임금에게 옮겨가면 몸을 버려 목숨을 바치게 되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피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십계명을 어기는 셈이 됩니다.”(「상재상서」에서)

 

정약종이 가족과 함께 성가정을 일군 곳이 바로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자리한 마재 성지이다. 18세기 후반 마재에 살던 나주 정씨 집안의 약전ㆍ약종(아우구스티노)ㆍ약용(요한 세례자) 형제가 한역서학서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익히고 복음을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마재 성지는 복음을 받아들인 정씨 형제들과 믿음과 순교로 성가정을 일군 정약종 가족을 현양하기 위해 지난 2006년에 조성됐다. ‘도마 성전’이라는 한글 현판이 걸린 한옥 성당과 약종 동산, 성가정 동산으로 꾸며져 있다. 성지는 순례자들이 성모님의 품을 느껴 위로와 치유를 받고, 성가정의 따뜻함을 담아가도록 소박하게 꾸며져 있다. 흙담에 기와를 얹고 담 아래에 들꽃을 심어 정원을 만들었다. 한복 입은 성모상과 성모님을 가운데 모신 정약종 성가정 모자이크화가 이곳 성지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일깨워 준다. 한옥 성당은 단아하다. 열린 문으로 숲길 산바람과 물길 강바람, 들길 꽃향기가 어우러져 함께 하느님을 찬미한다. 나무 제대에는 정약종 성가정의 다섯 순교자를 상징하는 형구가 장식돼 있다.

 

복자 유중철ㆍ이순이 동정 부부와 초남이 성지

 

조선 왕조 치하 박해 시기 순교자들 가운데 4쌍의 동정 부부가 있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유중철(요한)ㆍ이순이(루갈다) 부부와 최필제(베드로) 부부, 그리고 1819년 기묘박해 때 순교한 조숙(베드로)ㆍ권천례(데레사) 부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배문호(베드로) 부부이다. 모두 순교 복자이다.

 

이처럼 세계 교회사 안에 보기 드물 정도로 100년 가까운 박해 시기에 4쌍의 동정 부부가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모범을 따르기 위해 정결의 덕을 지키겠다는 젊은이들 특히 여교우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동정녀들의 행적을 적어놓은 성인전(聖人傳) 「성년광익」과 정결을 예찬한 「칠극」은 동정을 지키려는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이러한 선한 영향은 가족과 집안으로 전파됐다. 그 증거로 이순이와 권천례는 이종사촌 간이다.

 

이순이의 아버지 이윤하(마태오)는 이익의 외손이다. 그의 어머니 권 씨는 권철신(암브로시오)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여동생이다. 권천례는 권일신의 딸이며, 복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의 동생이다. 유중철ㆍ이순이는 4년을, 조숙ㆍ권천례는 15년을 동정 부부로 살았다.

 

전북 완주군 이서면의 초남이 성지는 ‘호남의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생가터와 교리당이 있는 성지다. 유항검은 신유박해 때 부인 신희, 동생 유관검 부부, 큰아들 유중철ㆍ이순이 부부, 작은아들 유문석(요한), 조카 유중성(마태오), 노비 김천애(안드레아)와 함께 순교했고, 초남이 집은 파가저택(죄인의 집을 헐어 없애고 집터는 웅덩이로 만들어 집안을 완전히 파멸시키는 형벌)이 됐다.

 

호남 교회의 발상지인 이곳은 한국 교회 첫 번째 동정 부부인 복자 유중철ㆍ이순이 부부가 동정 서원을 하고 혼례를 한 곳이다. 또 복자 주문모 신부가 처음으로 전라도 공동체를 방문한 곳이다.

 

유중철은 16세가 되던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자신의 집을 방문했을 때 세례를 받았다. 이때 유중철은 “동정 생활을 하겠다”고 주 신부와 아버지 유항검에게 고백했다. 때마침 주 신부는 한양 이순이로부터 “동정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러자 주 신부는 염두에 두고 있던 유중철과 이순이의 혼인을 주선해 1797년 10월 둘은 부모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유중철은 동정 서약을 어길 마음이 생길 때마다 이순이와 함께 기도와 묵상으로 이겨냈고, 함께 순교의 길로 나가자고 굳게 다짐했다.

 

유중철은 1801년 봄, 이순이와 다른 가족은 그해 9월 중순 체포됐다. 부부는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먼저 순교한 유중철은 “누이”라고 부른 아내 이순이에게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유언의 쪽지를 남겼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