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영 시인 / 센서
온몸에 눈이 생기기 시작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인공센서가 나를 감지하기 시작한다 어둠 속에 서 있던 내게 불이 켜진다 은은하다 길쭉하게 늘어나는 내 그림자 나를 이끌고 방과 방을 걸어 다닌다 열두 개도 넘는 전등들이 스무 개도 넘는 그림자를 만들어 또렷이 지켜보고 있다 어둠 속에 들어 있던 그림자들을 펼쳐 놓고 이 모든 것을 기억하기 위해 전등들이 벽이라는 거울을 비춰준다 구부러지고 휘어지고 늘어나고 줄어들다가 터질 것 같이 커지는 얼굴이 몸통이 일렁거리는 착각의 방처럼 거울 벽이 나를 감지한다 고압의 전류가 흐르는 전선이 벽 속에 들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커다란 덩어리에 팔 벌린 다리를 꼬고 있는 가지들 줄기들 실뿌리들 빨갛다 저것 내 속에서 불이 켜져 있던 것 소가죽만큼 질긴 잘 벗겨지지도 않는 들러붙은 벽과 전등이 태울 듯이 지켜본다
아주 오랫동안 달고 다닌 눈물이다
권오영 시인 / 카페 도시선언
대낮처럼 환한 심야 도시 한복판. 시공을 날고 있는 헤리포터가 그려진 시네마타운. 그 아래 바다나라 게임장과 럭셔리 미용실. 몇 계단 더 아래 민속주점 대장금. 몇만 년 흘러온 것처럼 그 계단 내려와 지하에 앉아 있다. 세계 일주하며 사들인 기념품이 벽과 천장 바닥과 테이블마다 그득한 카페. 누군가 나를 발굴해 이곳까지 끌고 온 지층과 지층 사이. 너는 지금 체리주스를 마시며 웃고 있다. 메이드 인 인디아 카펫을 깔고 앉아 금욕주의에 대해 혹은 쾌락에 대해 얘기를 했던가. 서경덕과 황진이 얘길 꺼냈을 땐 좀 더 진지하게 미간을 찌푸렸던가. 투명한 유리잔의 붉은 주스와 베레모를 쓴 체게바라 사진을 흘금거리는 나를 네가 본다. 머리에 눈알이 박힌 너는 나를 정면으로 보고 있다. “너는 어디서 흘러온 물고기지?” “알고 있잖아요.” “물론 알고 있지. 하지만 난 네가 말하기를 원하는 거야.” 뻐꿈뻐꿈 네 입술은 붉고 종이처럼 얇다. 네가 끝없는 말을 할수록 요구할수록 나는 무겁다. 너와 나는 그런 식으로 중심을 잃기 시작한다. 바닥에서 웅크리고 있는 병든 강아지를 보며 카페 프란스와 이국종 강아지를 얘기한다. 너의 말에서 속성으로 자란 손톱들이 재빠르게 내 심장을 꺼내고 있다. 모른 척 나는 허파 간 쓸개까지 내어주고 있다. 그가 오래오래 나를 씹는다. 나는 아프지 않다. 인터네셔널한 고스톱 게임을 하고 있는 카운터 여자가 컵라면 국물까지 다 마시도록 너와 나 사이엔 유유히 강이 흐른다. 몇 개의 달이 구른다. 지하와 지하. 심해를 거슬러 오르는 계단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올라간다. 꺼질 줄 모르는 눈알들. 낮만 있는 지하에서 눈 뜨고 잠든 채 흘러 다니는 물고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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