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커라 시인 / 가위
펴지지 않는 우산처럼 걷습니다 깨진 알전구 아래
운동화에서 떨어지는 흙은 저세상의 것입니다 머리카락이 쫓아다니며 쓸어 댑니다
알 수 없는 것들을 알게 될수록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외출하지 못한 밤이 구겨진 신발을 들고 옵니다
밤마다 돌아누워 멀어집니다 가까이 다가오면 할퀴며 달려갑니다
말 좀 들어 봐 너, 나 보이잖아?
너는 너를 다 모릅니다
그곳에서
응고된 생각 하나가 꿈틀거렸습니다
나는 깨어나는 중입니다.
송커라 시인 / 겨울밤
너랑 같이 놀아요 서로의 맨손을 잡기에 손가락이 시리군요 우산을 펼까요?
이곳이 알래스카만큼 하얗고 광활해지는 걸 지켜볼래요? 에스키모인들은 고래 갈비뼈로 집을 지었대요 죽은 고래 품에서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고 다시 사냥을 하고 싸우고 죽이며 협박하며
우리도 그렇게 살아 볼까요? 서로의 살을 태우는 냄새를 함께 맡으며
수은처럼 눈이 오고 있어요 동동 떠다니다 녹아내릴 것들에 자꾸만 눈(雪)이 가요
우산 아래 우리 둘
어깨가 기울어져 있는 우리 둘 쌓이다가 녹아내리고 까맣게 흘러내리는 눈과 같군요
당신을 똑바로 본 지 얼마나 되었나요 밥이라도 먹을까요? 오늘 밤은 누구를 도마 위에서 잘라 볼까요 같이 걸어가 볼까요? 배가 부르면 우리 다시 쓸쓸해질까요
송커라 시인 / 그러니까 컵 속에는
물 한 방울 그리고 바닥에 깔린 어둠뿐인데
컵을 흔들었다 청동방울처럼 물방울이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작게 쪼개졌다
비가 올 것 같아
눈동자 속은 온통 물이다 숟가락으로 컵 속을 찔러 힘껏 돌렸다
자전하는 세계 속으로
파도가 밀려온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오는 물의 형태들
황급히 컵을 뒤집었다
가장자리로 천천히 매달리는 손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악수
주술이 컵을 마구 흔들었다 종말은 여전히 멀었는데
울지 말아요 숟가락을 내려놓고 누군가 외친다
위로 솟구치는 빗물들
무엇이 이토록 부딪치는가 곧 쏟아질 것처럼
송커라 시인 / 설탕의 집
자르기 쉬운 것들은 예쁘다
둥근 칼이 파고든다
너는 참 질기구나
빵 사이로 쏟아지는 백지 끓고 있는 설탕 엄마는 맨손으로 냄비를 저었다 우리들은 일렬로 앉아 하얀 벽을 보았다
아빠는 동화가 질색이라고 했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엄마는 설탕을 접시에 덜어 냈다 쩍쩍 붙은 손가락이 오그라들었다
우리는 매일 식탁에 앉아 같은 시간에 빵을 먹는다
서로를 찢어 입에 넣는다 뜨거운 잼을 온몸에 발라 구석구석 핥는다
식탁은 매일 한 뼘씩 자라나고 빵 접시도 늘어났다 구멍 난 호주머니에는 부스러기로 가득찼다
부스러기를 몰래 주우며 어떻게 하면 식탁을 반으로 자를까 둥근 칼과 상의했다
엄마는 동화는 슬퍼야 잘 팔린다고 했다 먹고산다는 게 슬프다고 하자 모두 방으로 들어갔다
방마다 부스러기를 흘리고 다니지만 아무도 주워 먹지 않았다
그날 밤 무딘 칼로 식탁을 잘라 낸다 동화 속에는 밥상이 없었다
송커라 시인 / 헤모글로빈
흐르는 핏물 속을 헤엄치는 열대어
혈관 속 살핏줄에 사로잡혔다
들숨과 날숨 때마다 잉크병 같은 이빨들이 떨어져 나가고
뭉그러진다 쏟아져 나온다
더는 작아질 수 없을 때까지 투명하게 분해되는 살
태초에 사람은 지느러미였다 저마다 비어 있는 병을 찾아 헤엄쳐 갔었다
물고기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하얀 이빨 자국으로 온몸 구석구석 새겨지면
피 흐르는 소리에 놀란 다음 주자가 태어나 죽을 준비를 마쳤다
2021년 계간 《시작》 당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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