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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용주 시인 / 배 나온 남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22.

유용주 시인 / 배 나온 남자

 

 

특별하게 잘 먹는 것도 아니고

운동부족도 아니다 오히려

많은 날들을 배고픔에 시달렸고

어린 나이에 각종 일로 온몸 성한 곳이 없는데

이상하다 물만 먹어도 살이 오른다

 

밥 앞에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비굴하게 밥을 번 적은 없다

북한 어린이 돕기 성금보다 술값을 더 지출한 게 사실이지만

큰맘 먹고 하는 외식도

고작해야 자장면이고 특별히 탕수육을 곁들인 날은

밤새 설사로 고생했다

 

굶은 기억이 살찌게 하나

슬픔이 배부르게 하나

그 기억을 잊기 위해 얼마나 허겁지겁 살아냈는지

잊는다는 것이 병을 주었나

 

참는 것이 밥이었고

견디는 일이 국이었고

울며 걷던 길은 반찬으로 보였는데

 

배 나온 사람들을 보면

부황과 간경화로 먼저 간 식구들이 떠오른다

 

저, 좁은 땅 다 파먹고 말없이 누워있는

슬픈 무덤 덩어리들

 

 


 

 

유용주 시인 / 형제간

 

 

겨울 신무산에서

고라니똥을 만났다

 

쥐눈이콩처럼 반짝이는

무구한 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완벽한 채식만이

저 눈빛을 만들 수 있으리라

 

쌓인 눈 위에 찍힌 황망한 발자국들......

똥 누는 시간마저 불안했구나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다

나도 그저 한 마리 채식동물에 불과한데

 

미안하다,

미안하다...

 

 


 

유용주 시인

1959년 전북 장수 출생. 1991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시 「목수」외 2편을 발표하며 등단. 1997년 제 15회 신동엽 창작기금 수혜. 시집으로 『가장 가벼운 짐』 『크나큰 침묵』 『은근살짝』 『서울은 왜 이랗게 추운겨』 『어머니도 저렇게 울었을 것이다』 『내가 가장 젊었을 때』 등. 산문집으로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초등학교를 졸업한 열네 살에 중국집에 '속아서 팔려 간' 이래 가난과 노동의 삶을 견디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