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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채민 시인 / 정말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23.

이채민 시인 / 정말

 

 

눈 위에 겹겹이 쌓인 편지와 맹세가

아픈 봄을 지나고 사라졌다

 

눈부신 안개꽃 다발도 간절한 바램을 망각하고

사과꽃 무더기무더기 나비의 방도 녹이 슬었다

 

까보다로까* 땅 끝 절벽에서 내 몸을 감싸 안은 안개가

빛나는 혀를 자르고 지나간다 사라진다

 

표지판을 놓치고

노랑을 상실한 해바라기에서

파란 피가 솟구친다

 

붉은 심장에서

마지막 징후가

새파랗게 쏟아진다  

 

*포루투칼의 서쪽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 되는 마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1년 7월호 발표

 

 


 

 

이채민 시인 / 봄을 버리다

 

 

시작은

매일 뜨는 태양이 죽었고 무진장 비가 왔다

 

봄비의 설렘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성경은 염려하지 말라했는데 종종 무한반복 그것들을 끌고 소비하며 입고 먹은 죄 함부로 촛불을 켜둔 죄 그리고 벌

 

바닥을 내리치는 빗줄기보다 매몰차게 날아든

기울대로 기울어진 3월 그믐밤의 문장을

몸이 받아 적었다

 

모두가 잠든 밤에도

천둥의 하울링을 찢는 비의 독설을 남김없이 주워 먹는

먹을 때마다 앙상해 지는

한 때는 꽃이었던

꽃잎들

 

아침이 되고

나를 위한 창

으로부터 피어오르는 태양을 본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은

명료해진 꽃들의 의식

 

봄을

버리기로 했다

 

계간 『서정시학』 2022년 봄호 발표

 

 


 

 

이채민 시인 / 오이도 2

 

 

바다는 어디로 가고

낮은 구름이 발목을 잡는다

누군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하늘이 글썽인다

 

짭쪼름한 조개들의 눈물 한 바가지가 칼국수 국물로 나왔다

우리는 조개의 눈물을 파헤치며

부풀어가고

뜨거운 면발에서는

서늘한 소문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래서그녀가죽었고 그래서그시인이죽었고 그래서그들은끝이나고 . . .

소문은 집요했고 환했다

 

조개들의 눈물이 칭칭 목에 감겨오고

말은 어디까지 날아가서 다시 면발에 감긴다

 

나란히 누워 있는 죽음과 끝

끝과 죽음, 무엇이 먼저였을까

 

소문과 면발 사이에서 태어난 파도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짭쪼름한 국물 속에서

나는 뜨거웠고

여러 번 서늘했다

 

계간 『애지』 202년 가을호 발표

 

 


 

 

이채민 시인 / 패각

 

 

버거운 물의 시간

기울어진 각도 만큼 빠르게 흐른다

 

견디는 방식이 서로 다름처럼

꼬리와 표정을 지우는 흔적들

 

껍데기에 붙어살던 따가운 사랑과 또렷한 문장을 지우고

촉수를 뻗어나가는 내밀한 저 습관

 

숨구멍을 찾아

온 몸으로 밀고 당겨야하는 뻘에서

함묵하는 최선의 슬픔들

 

비 오고 땅 굳어진다지만

모래바람과 불가능이 웅성이는

갯벌은 누추할 뿐

 

누군가 버린 오늘 속에

우리는 물처럼 섞여있다

 

계간 『시와 문화』 2021년 가을호 발표

 

 


 

이채민 시인

충남 논산에서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졸업. 2004년 ≪미네르바≫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기다림은 별보다 반짝인다』 『동백을 뒤적이다』 『빛의 뿌리』 『오답으로 출렁이는 저 무성함』 등이 있음. 제7회 미네르바작품상과 서정주문학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사무총장 역임. 현재 계간『미네르바』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