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민 시인 / 정말
눈 위에 겹겹이 쌓인 편지와 맹세가 아픈 봄을 지나고 사라졌다
눈부신 안개꽃 다발도 간절한 바램을 망각하고 사과꽃 무더기무더기 나비의 방도 녹이 슬었다
까보다로까* 땅 끝 절벽에서 내 몸을 감싸 안은 안개가 빛나는 혀를 자르고 지나간다 사라진다
표지판을 놓치고 노랑을 상실한 해바라기에서 파란 피가 솟구친다
붉은 심장에서 마지막 징후가 새파랗게 쏟아진다
*포루투칼의 서쪽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 되는 마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1년 7월호 발표
이채민 시인 / 봄을 버리다
시작은 매일 뜨는 태양이 죽었고 무진장 비가 왔다
봄비의 설렘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성경은 염려하지 말라했는데 종종 무한반복 그것들을 끌고 소비하며 입고 먹은 죄 함부로 촛불을 켜둔 죄 그리고 벌
바닥을 내리치는 빗줄기보다 매몰차게 날아든 기울대로 기울어진 3월 그믐밤의 문장을 몸이 받아 적었다
모두가 잠든 밤에도 천둥의 하울링을 찢는 비의 독설을 남김없이 주워 먹는 먹을 때마다 앙상해 지는 한 때는 꽃이었던 꽃잎들
아침이 되고 나를 위한 창 으로부터 피어오르는 태양을 본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은 명료해진 꽃들의 의식
봄을 버리기로 했다
계간 『서정시학』 2022년 봄호 발표
이채민 시인 / 오이도 2
바다는 어디로 가고 낮은 구름이 발목을 잡는다 누군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하늘이 글썽인다
짭쪼름한 조개들의 눈물 한 바가지가 칼국수 국물로 나왔다 우리는 조개의 눈물을 파헤치며 부풀어가고 뜨거운 면발에서는 서늘한 소문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래서그녀가죽었고 그래서그시인이죽었고 그래서그들은끝이나고 . . . 소문은 집요했고 환했다
조개들의 눈물이 칭칭 목에 감겨오고 말은 어디까지 날아가서 다시 면발에 감긴다
나란히 누워 있는 죽음과 끝 끝과 죽음, 무엇이 먼저였을까
소문과 면발 사이에서 태어난 파도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짭쪼름한 국물 속에서 나는 뜨거웠고 여러 번 서늘했다
계간 『애지』 202년 가을호 발표
이채민 시인 / 패각
버거운 물의 시간 기울어진 각도 만큼 빠르게 흐른다
견디는 방식이 서로 다름처럼 꼬리와 표정을 지우는 흔적들
껍데기에 붙어살던 따가운 사랑과 또렷한 문장을 지우고 촉수를 뻗어나가는 내밀한 저 습관
숨구멍을 찾아 온 몸으로 밀고 당겨야하는 뻘에서 함묵하는 최선의 슬픔들
비 오고 땅 굳어진다지만 모래바람과 불가능이 웅성이는 갯벌은 누추할 뿐
누군가 버린 오늘 속에 우리는 물처럼 섞여있다
계간 『시와 문화』 2021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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