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광기 시인 / 소금쟁이의 바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3.

김광기 시인 / 소금쟁이의 바다

 

 

지금, 여기까지는 가능했을 것이다.

여름과 겨울이 서로 섞일 수 없듯이

접점에 있는 시간이 그 경계를 사뿐히 스쳐갈 뿐,

하늘을 나는 새들의 날갯짓이나

사념 없는 몸을 길게 누이고 바람 따라

흔들거리고 있는 새털구름 같은 것,

어정쩡하게 하늘에 다리를 꽂고서

어디로 입수해야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잠수부,

저 깊은 속을 온전히 믿어야

바다는 제 품을 투명하게 비춰줄 것이지만

색색의 산호와 조개들이 입을 열고

해초와 불가사리마저 자신들의 세상을 보여줄 것이지만

공간과 시간조차 분별하지 못한 생애는

비극적으로 놀라운 연민을 낳기도 하거니와

심해의 컴컴한 어둠만을 두 눈에 담고

온 생애를 추종하며 두려워하고만 있는데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소금쟁이,

헛발을 디디고 헛꿈을 꾸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분명, 여기까지는 가능했을 것이다.

시공간이 혼합되는 가끔씩은

짙은 빛깔이 물들어 있기도 하겠다.

 

 


 

 

김광기 시인 / 꽃이 지는 시간에

 

 

일출봉 동암사에 만발하는 수국들, 수십 수백의

봉오리들이 한 꽃을 이루고 분홍 보라 청 그리고 백색

 

찬란하게 초여름을 빛내다가 한여름이 들어서자마자

화상을 입고 몸서리치며 일그러지는 소신공양

 

꽃이 핀다고 꽃 같은 시절만 있었으랴.

 

영욕의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다 피폐해지기는 한다지만

저 모양만큼 극명하게 다른 것이 있을까.

 

다른 꽃들이 일제히 지고 있는 시간에

구석에서 눈치만 보고 있다가 뒤늦게 피고 있는 꽃도 있다.

 

꽃들이 만발한 틈 속에서

꽃망울을 수줍게 내밀다가, 그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화사하게 제 모습을 뽐내고 있는 꽃

 

늦게 피어서 더 아름다운 것인지

짠하게 있어서 더 매혹적인 것인지

늦둥이 꽃을 보면서는 쉽게 눈을 뗄 수가 없는데

 

피고 지는 모습을 한 무더기에서 동시에 보이고 있는 꽃들,

절간을 울리는 염불 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김광기 시인

1959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 동국대 문예대학원 문창과 석사, 아주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1995년 시집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를 내고 작품 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호두껍질』, 『데칼코마니』, 『시계 이빨』 등과 시론집 『존재와 시간의 메타포』, 학습서 『글쓰기의 전략과 논술』 등이 있음. 1998년 수원예술대상 및 2011년 한국시학상 수상. 현재 계간 『시산맥』 편집위원, 아주대 등 출강. 학점은행제 <한국보육교사교육원> 운영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