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기 시인 / 소금쟁이의 바다
지금, 여기까지는 가능했을 것이다. 여름과 겨울이 서로 섞일 수 없듯이 접점에 있는 시간이 그 경계를 사뿐히 스쳐갈 뿐, 하늘을 나는 새들의 날갯짓이나 사념 없는 몸을 길게 누이고 바람 따라 흔들거리고 있는 새털구름 같은 것, 어정쩡하게 하늘에 다리를 꽂고서 어디로 입수해야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잠수부, 저 깊은 속을 온전히 믿어야 바다는 제 품을 투명하게 비춰줄 것이지만 색색의 산호와 조개들이 입을 열고 해초와 불가사리마저 자신들의 세상을 보여줄 것이지만 공간과 시간조차 분별하지 못한 생애는 비극적으로 놀라운 연민을 낳기도 하거니와 심해의 컴컴한 어둠만을 두 눈에 담고 온 생애를 추종하며 두려워하고만 있는데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소금쟁이, 헛발을 디디고 헛꿈을 꾸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분명, 여기까지는 가능했을 것이다. 시공간이 혼합되는 가끔씩은 짙은 빛깔이 물들어 있기도 하겠다.
김광기 시인 / 꽃이 지는 시간에
일출봉 동암사에 만발하는 수국들, 수십 수백의 봉오리들이 한 꽃을 이루고 분홍 보라 청 그리고 백색
찬란하게 초여름을 빛내다가 한여름이 들어서자마자 화상을 입고 몸서리치며 일그러지는 소신공양
꽃이 핀다고 꽃 같은 시절만 있었으랴.
영욕의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다 피폐해지기는 한다지만 저 모양만큼 극명하게 다른 것이 있을까.
다른 꽃들이 일제히 지고 있는 시간에 구석에서 눈치만 보고 있다가 뒤늦게 피고 있는 꽃도 있다.
꽃들이 만발한 틈 속에서 꽃망울을 수줍게 내밀다가, 그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화사하게 제 모습을 뽐내고 있는 꽃
늦게 피어서 더 아름다운 것인지 짠하게 있어서 더 매혹적인 것인지 늦둥이 꽃을 보면서는 쉽게 눈을 뗄 수가 없는데
피고 지는 모습을 한 무더기에서 동시에 보이고 있는 꽃들, 절간을 울리는 염불 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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