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배 시인 / 미미 물랑
미미는 만났던 사람이었고 미미는 살았던 집이었고 미미는 지금도 만나는 사람이고 미미 지금 사는 집이고 미미 어느날 연락이 끊어지고 미미 안개에 덮이고 미미 죽었을지 모르고 미미 도로가 들어설 예정이고 미미 문득 그립고 미미 창가에 해가 들고 미미 문득 살아 있고 미미 문을 연다 미미 물을 흘리는 알몸이고 미미 물이 흐르는 잠 속이고 미미 사랑에 빠지는 계절이고 미미 이사 철이다 미미 물결이 일고 미미 잠깐 살아본다 미미 헤어질 것이고 미미 떠날 것이고 미미 물랑 미미 물랑
-시집 <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에서
신영배 시인 / 물모자를 쓰고
나는 물모자를 쓰고 거짓말을 했다 나의 바구니에는 사과가 가득 사과는 속이 썩어 있었다 맛있는 사과 사과 사세요 사과 사세요 나는 물모자를 쓰고 사과는 시간 하루 벌어 하루 실패하는 때가 많다 유모차를 끄는 엄마에게 빨간색 핸드백을 멘 아가씨에게 빨간색 사과는 빛 등 뒤에서 나무가 물모자를 흔들었다 아침에 지나간 여자가 저녁에 찾아왔다 사과를 반으로 쪼개 보이며 썩 썩 썩 썩었잖아요 나는 물모자를 쓰고 소녀 얼굴이 빨개지고 다시 맛있는 사과 사과 사세요 사과 사세요 썩은 사과를 쪼갠 바람이 밤과 함께 찾아왔다 어어어 어쩌라고요 나는 바구니를 엎고 소리를 질렀다 사과가 흩어지고 사과는 시간 검은 물방울이 벌어지기도 하는 나는 물모자를 쓰고 할머니 초승달이 떴다 사과는 빛 물모자가 나뭇가지에 걸렸다 나무는 초승달 속에 사과를 주워 담았다
신영배 시인 / 나의 아름다운 방
오후 두 시 방향으로 나는 상자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얇게 접어둔 다리
의자는 새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앉아 있던 잠이 툭 떨어져 내린다 의자가 쓰러지고 새가 아름답게 나는 방
오후 네 시 방향으로 나는 물병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흠뻑 젖은 주둥이로 다리를 조금 흘린다 관 뚜껑을 적시는 문장
화분은 고양이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깨진 고양이가 내 손등을 할퀸다 씨앗이 퍼진다 갈라진 손등에 고양이를 묻고 해 질 녘 손의 음송
오후 여섯 시 방향으로 나는 기다란 악기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붉은 손가락으로 관 속의 다리를 연주한다
커튼은 물고기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젖히자 출렁이는 강물 속 내 다리가 아름답게 흐르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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