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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설희 시인 / 유리창이 달아난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5.

박설희 시인 / 유리창이 달아난다

 

 

속을 들여다보려고 한 것도 아닌데

베란다 유리창이 달아난다

제 모습 들키지 않으려고

얼룩 화장, 물방울 장식, 검은 외투

텔레비전을 데리고

화분을 데리고

 

알 수 없는 곳으로 자꾸 달아난다

유리창을 따라 잡으려면

나도 달아날 수밖에 없다

어스름 속으로 어둠 속으로 허방 속으로

유령처럼 스며들어

 

소파에 올라앉은 비닐하우스

실내를 달리는 자동차

수족관에 걸려 있는 전선

나를 관통하는 전봇대......

함께 달아나는 것들 뿐

 

모서리진 것들이 맞물려 이룬

위험한 매끄러움 속에서

동백꽃 하나 툭 목을 꺾는다

꺾인 목도 달아난다

 

 


 

 

박설희 시인 /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

 

 

 그가 구름 한 채를 그물에 떠메고 들어왔다 구름은 물고기처럼 싱싱했다 갖가지 색깔을 품은 채 푸득거렸다 비늘 같은 게 반짝였다 우리는 심심했다 둘러앉아 구름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간이 안 밴 구름을 먹은 우리는 늘 배가 고팠다 자꾸 시선이 공중으로만 향했다 잘 익은 해가 걸려 있었다

 

 우리 모두 구름이 되자, 구름은 늘 배부른 표정을 하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그의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일정한 모양도 색깔도 없이 다들 흘러 다녔다 가끔씩 만신창이가 되도록 지상으로 투신했을 뿐, 조금의 얼룩을 남겼을 뿐, 다시 돌아와 무심한 표정으로 발 밑 을 내려다보곤 했다.

 

대문 한 켠에 쪽문이 달려 있었다

그 구름은 쪽문으로만 드나들었다

쪽문으로만 드나들었으므로

쪽문보다 더 작았다

문은 늘 젖어 있었다

문 양쪽에 노란 민들레가 피어 있었다

 

끝없이 리필, 리필 되는 구름

무너져 내리면서 폭발하듯 부풀어 오르면서

걸레처럼

깃발처럼

 

 


 

박설희 시인

1964년 강원도 속초 출생. 성신여자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한신대 문예창작대학원을 졸업. 2003년 계간 《실천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실천문학, 2008), 『꽃은 바퀴다』가 있음. 사)한국작가회의 회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