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장선희 시인(마산) / 크리스털 사막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9.

장선희 시인(마산) / 크리스털 사막

 

 

남극은 바람의 오지

한번 내린 것은 떠날 수 없다

불안한 일기도를 가진 사람은

언제든 제 몸에 바람을 가둘 수 있다

 

흰모래언덕 지나 불모의 바람이 서식하는 거기

사구처럼 치솟은 만년설

그 어딘가에 숨어든 사막 찾아

한 무리 펭귄이 하얀 구릉을 미끄러진다

 

흰모래가 숨어 있는 하늘

누구의 접근도 허용치 않는다

그 단단한 침묵이 몇만 년을 숨겨놓았다

시력을 잃으면 나타나는 신기루

펭귄 마을이 있다는 비밀지도가 나타난다

 

오아시스를 숨긴 중심부를 찾았는지

나침반 바늘이 낙타 눈썹처럼 떤다

쇄빙선이 지나가자

만 년 전 바람이 몸을 일으킨다

 

펭귄만이 아는 바람의 오지

부리로 변한 내 입술에 얼음꽃이 핀다

 

 


 

 

장선희 시인(마산) / 유르트*와 소녀

 

 

유르트에서 태어나 유르트에서 죽는다

 

말들은 바람의 날개처럼 초원을 내달린다

인류학자는 그것을 초원주행증후군이라고 말했다

질주본능이 가득한 말구유 속울음이 구름의 방문을 반긴다

거대 풍경화로 그려지는 일몰,

낮은 포복으로 메마른 땅을 달린

풀에 그려진 지평선

누구에게도 끝없이 펼쳐진 초원지대는 없다

 

암말의 초유를 짜는 의식

여자들은 긴 속눈썹이 암각 된 선사시대의 바위그림 위로

신성한 마유 한 방울 떨어뜨리길 좋아한다

그동안은 누구도 발소리를 내선 안 된다

 

기다렸던 님은 하늘이 보낸 사람이라는 속담

향나무 속을 파낸 구유통 속에서 익는다

 

고기, 마유, 소금, 곡물... 7가지 재료의 ‘코제’

잘 버무린 죽은 일곱 가지 덕을 상징한다

그 덕을 지키려 사투를 치렀던 처연한 유목

 

긴 목의 돔브라를 춤추는 여인

염소인형 오르테케

연주자가 불러내는 형상대로 춤을 춘다

바로 요르~ 요르~ 바로 요르~ 요르~

덫에 걸려 죽은 아기염소

춤추는 인형으로 부활시키는 춤

삶의 매 순간은 구전 노래로 영생을 꿈꾼다고

기록되지 않아 오히려 전통이 살아 있다는 생각을

악사들 손가락이 한 필의 말로 달린다

 

말의 수호신 ‘캄바르 아타’

뿔과 날개를 가진 말을 사랑하고픈 소녀들은

말을 배우기도 전에 말을 탄다

 

목초지의 수호자인 미트라신

사냥터로 떠난 남자들이 거대한 산짐승이 되어 돌아와야 한다고

M자 모양 활을 독려했다

 

쌍팔찌 코스 빌레지크 차고 있던 어린 신부

은을 선호한 어머니의 그 어머니들처럼 현명하다

벽사 효능 가진 은가락지에 남자의 가슴을 가둔다

 

그리핀 장식이 머리맡에 놓여 있는 유르트 안

유목의 남자로 살아가려면

용맹한 사자와 독수리의 민첩함을 가져야 한다고

마을의 수호신 마나스티를 점지해 준다

 

별자리를 따라 순환하는 유르트

지치지 않고 달려가는 한 마리 말이다

 

*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이 쓰는 이동 가능한 주거.

 

 


 

장선희 시인(마산)

1964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2년 제1회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크리스털 사막』(현대시, 2020)이 있음. 제5회 월명문학상 수상. 2020년 울산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