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준 시인 / 실조失調
돌아가신 어머니의 목소리 들리기 시작했다니 행복해졌다는 그녀 가족들 죄다 떠나간 집에 혼잣말 남았다 벽을 타고 다니며 반짝이는 어머니 보일러 끄고 잠자리를 펴 누웠다 커튼 치고 창문을 걸어 잠갔다 꺼진 불 되살리려는 듯 바닥에 웅크리고 촘촘한 거미줄 너머에서 숨죽이고 있다 여기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요? 궁금함이 더는 오고 가지 않으나 거의 끝났다고 생각했다 전화벨 소리 멀리 지나가다 주지앉는다 누가계세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싫어서 모른 체하고 싶었다 병원 창밖 정원에는 새 한 마리 앉아 햇볕을 오래 쬐고 있다 치료가 끝났다는 의사의 말 때문에 어머니의 목소리 날아갔다 다시 혼자된 그녀는 등기 소포 들고 초인종 누른다
김호준 시인 / 침습侵襲
반짝거리는 천장은 바이러스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지 않는 사람은 바이러스 때문이다 갑자기 우는 고양이는 바이러스 때문이다 멀어질수록 더 빨리 멀어지는 거리는 바이러스 때문이다 성장통을 겪는 몸짓은 바이러스 때문이다 계급은 바이러스 때문이다 쉽게 흔들리는 식탁은 바이러스 때문이다 앙칼진 눈 마주침은 바이러스 때문이다 파티는 바이러스 때문이다 잘 안 되는 연락은 바이러스 때문이다 바람에 터지는 석류는 바이러스 때문이다 그늘에서 소가 쓰러지는 건 바이러스 때문이다 방을 나오지 못하게 재워진 빗장은 바이러스 때문이다 아래로 쏠리는 먼지는 바이러스 때문이다 여름에도 덮는 이불은 바이러스 때문이다 발에 가득 낀 각질은 바이러스 때문이다 천성이 죄인이란 바이러스 때문이다
김호준 시인 / 월유(月幽)
케케묵은 이들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하얗게 세는 노인처럼 열려 있는 병실 창문 달빛은 방에서 가장 냄새나는 부위를 파고든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환자는 이제야 허리를 편다 뼈마디 소리에 뚝뚝 부러져 버리는 수면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거울마저 두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쨍그랑 소리에 퍼져가는 조각은 이미 바깥세상 절반은 흩어진 그것을 다시 꺼내 본다 여기 이 할아버지에게는 어디쯤이었을까 기름때 진한 작업복을 입고 아들의 학교 가는 길에서 마침 오늘은 소풍날이었다 아버지와는 등을 지고 어둠을 향해 달려 나가는 아들 불쑥불쑥 무대에 오르는 퇴역 배우처럼 그는 손을 허공에 휘젓는다 얇은 눈꺼풀 내려와 불현듯 조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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