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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홍점 시인 / 서호에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15.

박홍점 시인 / 서호에서

 

 

호수는 가장자리부터 만신창이 속내를 드러내 보인다

물새들은 썩은 물에도 발을 담그고 논다

부리를 처박았다 뺐다

그칠 줄 모르는 새들의 식욕을

한참동안이나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들의 부리나 발이

왜 그렇게 매끄럽고 단단한지 알 것도 같다

 

자궁암 말기

생산이라곤 몰랐던 그녀의 자궁 속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악취가 출렁인다

죽어서 걸어 나오는 물

죽어서 안기는 물

이제는 여밀 수 없는 시간들이여

삼키고 흘려보냈던

눈물과 땀과 정액이 그녀 주위를 맴돈다

 

악취 속에서도 대지는 여전히 풀꽃을 피우고

마디를 늘리고 있는 나뭇가지들

밤이면 어김없이 켜지는 불빛들

아이들은 아랑곳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삼삼오오 희미한 불빛 아래 담소하던 이들은

날벌레들에게 기꺼이 피 몇방울 나누어 주고

늦은 밤 손 흔들며 다리를 건넌다

칸칸이 매달린 몸을 끌며 어둠 속을 달린다

 

-시집 차가운 식사> (서정시학, 2006)에서

 

 


 

 

박홍점 시인 / 기억이 나를 본다?

 

 

귀와 눈을 새로 사줄게?

씻어놓은 흰 개미알들을 엎지르듯 쏟아 부은 말들을

모두 주워 담을게

제발 잊어줄래?

내가 너를 화장실 안에서 때린 거

보행기 안의 너를 샌드백처럼 후려친 거

우는 너를 건축 공사장 소음 속으로 밀어 넣은 거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저절로 간절했던 기도를 까마득히 잊었으면 좋겠어

머리칼과 눈썹을 새로 달아 줄게

뇌수를 새로 부어줄게

아가야,

뜨겁게 하루를 달구었던 태양이 물에 몸을 담그는 시간

나는 네 머리맡에서

걸리버 여행기 톰소여의 모험같은

이야기의 첫 장을 이제 막 펼쳤어

이라와 누우렴, 아가야

붉은 얼룩의 기억을 지우고 또 지울게

 

 


 

박홍점 시인

1961년 전남 보성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수학. 2001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차가운 식사』(서정시학, 2006), 『피스타치오의 표정』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