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이 시인 / 주름의 문장들
비애보다 깊은 그리움이, 파닥이는 기다림이 끝없이 조여드는 순간, 나는 주름진 그림자를 잡는다 얼음조각처럼 매끄러운 그림자 위에 텅 비어버린 포름한 낙서가 일렁인다 잠시 너를 내게 꿰매지 못하고 번역되지 않는 슬픔의 통증이 내 실루엣마저 벗기고 말았을 때 나의 꾸역꾸역 삼킨 그리움이 퉁퉁 붙더니 시간이 갈수록 야위어 갔다 푸른 비의 얼굴도 야위어 가는데 젖은 긴 머리 만져주던 서어나무의 그림자 말이 없던 강물이 밤으로 이동할 때 홀로된 새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허기진 문장의 몸이 꼬들꼬들 해가고 계절의 감옥에 갇힌 시간은 불안하다 문장의 언어들이 비탈진 길을 걷는다 뒤틀린 길에 문장의 씨앗무늬를 그리면서 그리움 속에 있으면 번개가 내린 것처럼 무겁고 기다림 속에 있으면 천둥이 내린 것처럼 더욱 무겁다
박정이 시인 / 역류를 거부한 얼룩
날카롭던 기억 속에 가끔 참다래꽃이 피는 것은 순전히 시간의 덕분이다 층층지게 쌓아 올린 돌탑처럼 기억을 쌓다 보면 얼룩지는 시간의 여울을 만난다 여울은 언제까지나 여울일 뿐 담겨져 있는 삶은 저만치서라도 머무는 법이 없다 체한 음식이 역류하듯 갑자기 굳어버린 삶의 흔적은 쉬이 사라지지 않고 가사假死의 삼치처럼 부활한다
고통이 수반된 부활, 온전할까 공생을 잃은 흐름, 왜곡된 역류는 언제나 탐욕이 물결친다 영원히 정지되기를 바라는 순간의 착각 여울을 넘어버린 여울은 상처가 된다 얼굴에 거뭇거뭇 피어나는 반점들을 지운다 해도 개안開眼수술 후 드러나는 얼굴의 수많은 진실들처럼 시간이 남긴 표정은 언제나 새롭다 참다래꽃처럼 불룩불룩 솟는 실핏줄도 내일은 시들고 역류를 거부한 얼룩만 드러난다 시들어 굳어가는 실핏줄의 피가 오래된 대지를 푸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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