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시인 / 장마
비는 그렇게 서서 나를 흘려보냅니다 이것은 모두 비의 환상입니다
빗줄기에 매달린 창문들은 인사를 합니다 그는 남은 옷가지와 가방이 정리되지 않은 채 또 하나의 죽음으로 잊혀지고 나는 내일 아침 세면대 앞에서 울고 있을 여자와 곧 냉장고 정리와 묵은 빨래를 마저 하지 못한 채 떠날 그녀를 알고 있습니다
날마다 방안의 온기를 유지하고 세월에 일그러지는 가구의 아귀를 맞추며 비밀번호를 간직한 방의 일부가 되어가는 일 빛바랜 사진 속, 그들의 품에서 풍선을 놓치고 울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는 이제 없습니다
오래된 흠집처럼 비는 서 있습니다 그와 함께 있었던 나는 지금 내리고 있는 창 밖 비의 환상입니다
박선경 시인 / 종種의 발견
사람들은 나에게 어법이 문제라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요, 길을 가다가 자꾸만 넘어져요 내가 가늠하는 바닥의 깊이보다 빠르거나 뒤늦게 펼쳐지는 리듬, 발을 헛디디는 순간 중심을 못 잡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서요 하지만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아요 나만 아는 통증 육화되지 못해 난해한 사유 발이 날개처럼 펼쳐진 익족류 물속에서 전기를 흘려보내고 있는 발광체의 몸통으로 털이 난 심해 생물 그 알 수 없는 어법과 대상들 사이로 자꾸만 넘어지는 어휘, 렙토세팔루스 파이로소멜라 베르티실리아타 히르수타 나는요, 전방 수백 미터를 알아볼 수 있는 시력을 가졌으나 입이 없어요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게 시속으로 질주하는 하루살이죠 초음파를 감지해내는 심해 모래바닥에 파묻혀 오천만년이 되어도 드러나지 않는 멸종되었거나 누군가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종種이에요 네가 정확하게 본 것을 말하라는 당신의 말은 믿지 않아요 말할 수 없는 것은 정확하고, 말했던 것들은 모두 퇴화되어가거든요 새로운 종種은 발견되고 그 고독한 시간의 이름도 늘 새로워야하지요 나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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