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 시인 /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나무는 황금빛이었다 그 찬란한 빛이 지지 않기를 기도했지만 나무는 잎을 떨구었고,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지나가는 시간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인가
너 없이도 가을이 가고 있었다
밤마다 너의 얼굴이 스쳤다 잠을 설친 내 아침은 늘 피곤했다 그때마다 나는 커피자판기 안으로 피곤을 구겨 넣듯이 동전을 밀어 넣었다
동전만 넣으면 새로 나오는 커피처럼 내 희망도 그렇게 쑥쑥 뽑아질 날이 있을 것인가
김현주 시인 / 금샘탕
‘다 때가 있습니다’
목욕합니다, 영업 중입니다, 오래 묵은 경전 표지 같은 탕 문을 열자 사유가 깊어집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탐하지 말라 했으나 그 밤, 뒤뜰에서 목욕하던 한 여인은 때를 잘 만나 왕을 낳았고, 유명한 왕은 ‘만사에 때가 있다’는 지혜의 책을 남겼지요
묵시록 같은 열탕 안에서 때를 기다리는 것은 지루합니다, 모락모락 피는 물안개에 젖은 알몸으로 차례를 기다립니다, 내 몸은 내 소관이 아니라는 눅눅한 생각이 한없이 미끄러운 바닥으로 추락하는 때
다음 손님 어서 오세요, 깜빡, 왕을 알현하듯 물침대에 누웠습니다, 사랑할 때가 있고 헤어질 때가 있듯이
손님, 뒤집어주세요, 탁탁, 손뼉을 치는 여자의 주술대로 시절(時節)이 뒤집힙니다, 여자가 이태리타월로 탁탁, 지나간 때를 털어냅니다, 이미 빗나간 당신도 내 소관은 아니지요
금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듯 천장에 모락모락 엉킨 물방울들이 탁탁, 하염없이 깨져 내 슬픔과 상관없이 둔부를 스물스물 더듬어 간지럽습니다
손님, 유난히 때가 많군요, 영업 중인 여자의 말이 진리 같은데 어찌 그리 서글픈지요, 패배와 승리의 때가 찰나인 양,
수문장처럼 서 있던 입간판 옆, 담벼락에 붙어 나란히 웃던 여러 왕들, 부정 탄 얼굴로는 아무도 귀가하지 못하는 한때입니다
‘다 때가 있습니다’ 금샘탕의 지붕 위로 때를 놓친 붉은 소나기 한 무더기 무효표처럼 아프게 쏟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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