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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현주 시인 /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16.

김현주 시인 /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나무는 황금빛이었다

그 찬란한 빛이 지지 않기를 기도했지만

나무는 잎을 떨구었고,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지나가는 시간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인가

 

너 없이도 가을이 가고 있었다

 

밤마다 너의 얼굴이 스쳤다

잠을 설친 내 아침은 늘 피곤했다

그때마다 나는

커피자판기 안으로 피곤을 구겨 넣듯이

동전을 밀어 넣었다

 

동전만 넣으면 새로 나오는 커피처럼

내 희망도 그렇게 쑥쑥 뽑아질 날이

있을 것인가

 

 


 

 

김현주 시인 / 금샘탕

 

 

‘다 때가 있습니다’

 

목욕합니다, 영업 중입니다, 오래 묵은 경전 표지 같은 탕 문을 열자 사유가 깊어집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탐하지 말라 했으나 그 밤, 뒤뜰에서 목욕하던 한 여인은 때를 잘 만나 왕을 낳았고, 유명한 왕은 ‘만사에 때가 있다’는 지혜의 책을 남겼지요

 

묵시록 같은 열탕 안에서 때를 기다리는 것은 지루합니다, 모락모락 피는 물안개에 젖은 알몸으로 차례를 기다립니다, 내 몸은 내 소관이 아니라는 눅눅한 생각이 한없이 미끄러운 바닥으로 추락하는 때

 

다음 손님 어서 오세요,

깜빡, 왕을 알현하듯 물침대에 누웠습니다, 사랑할 때가 있고 헤어질 때가 있듯이

 

손님, 뒤집어주세요,

탁탁, 손뼉을 치는 여자의 주술대로 시절(時節)이 뒤집힙니다, 여자가 이태리타월로 탁탁, 지나간 때를 털어냅니다, 이미 빗나간 당신도 내 소관은 아니지요

 

금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듯 천장에 모락모락 엉킨 물방울들이 탁탁, 하염없이 깨져 내 슬픔과 상관없이 둔부를 스물스물 더듬어 간지럽습니다

 

손님, 유난히 때가 많군요, 영업 중인 여자의 말이 진리 같은데 어찌 그리 서글픈지요, 패배와 승리의 때가 찰나인 양,

 

수문장처럼 서 있던 입간판 옆, 담벼락에 붙어 나란히 웃던 여러 왕들, 부정 탄 얼굴로는 아무도 귀가하지 못하는 한때입니다

 

‘다 때가 있습니다’ 금샘탕의 지붕 위로 때를 놓친 붉은 소나기 한 무더기 무효표처럼 아프게 쏟아집니다.

 

 


 

김현주 시인

전주 출생. 칼빈신학대, 고려신학대 졸업. 2007년 《시선》으로 등단. 시집으로 『페르시안 석류』와 2018년 인천문화재단 한국예술위원회 지원금으로 『好好해줄게』(시산맥사)를 출간. <유채꽃 광장의 증언>. 2016년 숲속의 시인상과 2017년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수상. 시인들이뽑는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