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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원철 시인 / 세상을 사랑하는 법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30.

신원철 시인 / 세상을 사랑하는 법

 

 

길을 걷다가 화단이나 좋은 나무를 보면

오줌이 마려워진다

그것들의 뿌리에 에너지를 보태고 싶어

하늘과 땅의 정기가 내 몸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오줌길을 통해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장엄한 순간을

초목과 나누며

그것들의 떨림을 듣는다

 

우리 집안을 일으키신 농자, 고조부께서는

절대 대소변을 밖에서 허비하지 않으셨다

참고 참으며 어기적 걸음으로

집에 돌아오신 다음

마지막 한 방울까지 두엄으로 보태셨다

 

이 아까운 걸 변기에 버리고 물까지 내린다고?

왕숙천 변을 친구들과 걷다가

갑자기 그 어른 생각에 돌아서서 대지를 흠뻑 사랑했더니

고조부 웃음소리 쟁쟁하게 들려온다

 

시집 『세상을 사랑하는 법(서정시학, 2022) 수록

 

 


 

 

신원철 시인 / 심우도*

 

 

비가 내리면 더욱 포근한 산자락

가까이 훌쩍 다가와 너울너울 품을 여는데

담장 아래 돌절구 속에서 피어오르는 수련

 

푸른 정기가 쏟아지는 거기서

다른 것 접고

밤새워 고스톱을 쳐보라

부처의 말씀은 그림 속에 있으니

인생길의 어디쯤에서

고나

스톱을 불러야 할지

 

자비심이 포근히 내려앉은 계룡산 절집 근처에서

눈알이 뻑뻑해지고 무릎과 골반이 시큰거리며

그저 드러눕고 싶어질 때쯤

아침이 붐한 창가에 등을 기대어보면

한 마디 나직한

할!

 

본전 생각 마라

그 손 한번 툭 털고

 

-시집 『세상을 사랑하는 법(서정시학, 2022) 수록

 

 


 

 

신원철 시인 / 한강 1

 

 

여의도 하늘에 뭉실뭉실한 구름

틈새로 쏘아 내리는 햇살

 

각이 뚜렷해지는 유리와 콘크리트의 실루엣

빼곡히 솟은 경제의 숲

 

그 아래 누렇게

끝없이 일렁이는 물그림자

 

- 한 번도 속 시원히 내려가지 못했지

- 하지만 언제 잠시라도 쉬었다더냐?

 

 


 

 

신원철 시인 / 상주

 

 

대구서 짧은 명절 보내고 서울로 죽죽 늘어지는 국도길,

무심코 지나가던 곶감과 누에의 땅

 

보리밭을 뛰어다니던 어릴 적 기억을 느릿느릿

밟고 있는데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며

 

- 그때 사또님은 이 길로 부리나케 달아났었니라

- 공갈못 연밥 처녀들 걷어붙인 허벅지가 여기의 명줄이었지

 

왜란 때 그 사또, 말방울 떨렁이며 잘도 달아났던 길

첫 부임 초등학교 교사 아버지가 나를 낳으시고

어린 학동들 가르치던 땅

 

 


 

 

신원철 시인 / 최재형 선생

- 안중근의 후원자

 

 

그나마 자유로웠던 옛 발해의 땅에서

부모 잃고 러시아인 양부모의 손에 키워져

나라에 빚진 것 없지만

오히려 내 민족 살려야겠다고 애쓰던 그

독립운동가들을 조용히 모으고

안중근을 도와 이등박문을 쏘아 죽이게 하고

남은 가족들까지 돌보다

일본군의 기습에 죽었다는데

 

북국의 찬 바람만 맞고 있었던 불멸의 혼

쓸쓸히 버려진 그의 흔적들

 

온갖 잡동사니가 드나들던 아라사*의 관문에서

울분과 열정을 끌어 모으던 신한촌

기념비 셋, 눈물에 젖고 있다

 

 


 

 

신원철 시인 / 개벽 2018

 

 

지붕을 열어놓은 스타디움에서

암흑의 벌판으로 퍼져나가며

겨울 하늘을 쩡쩡 찔러대는 빛의 창들

 

고난과 역경을 딛고 올라선 희망과 에너지가

아이들의 통통 튀는

춤과 노래로

빛의 강을 뗏목으로 건너는

다른 아이들도 통통

 

반도 동쪽의 한구석에서

만주를 넘어 시베리아, 우랄까지 뻗어가던

요란한 함성에

차가운 대기가 후끈거리고

 

이 심심 산골짝에서

눈과 얼음의 잔치가 열리고

세계의 젊은이들이 모여들게 될 줄이야

 

버려져서 숲과 물이 맑은 땅

너무 맑아 물고기와 짐승만 살던 땅

 

춤추는 김연아의 나선형 성화가

검은 하늘을 뚫자

쏟아지는 별들이 빛의 오륜을 만들고

 

이북의 형제들까지

노래하고 춤추며 찾아올 줄이야

 

 


 

 

신원철 시인 / 중랑천 3

- 텃밭 가꾸는 사람들

 

 

장안교에서 장평교 사이 긴 블록의 텃밭

강변의 아파트 주민들이 농사지어놓은

상추밭, 고추밭, 파밭

이랑마다 농사꾼 이름이 문패처럼 달려 있고

흙이 그리워 나들이 나온 두 가족

농사를 짓나

이야기를 짓나

손뼉을 치며 깔깔대는 두 여자

비스듬히 막걸리를 따르는 두 가장

흙냄새 깊이 들이마시며

생활의 짜증을 털어내는 옆에서

파랗게 반짝이는 풋고추 잎사귀들

둑 너머 높은 아파트는 계속 기웃거리고

다 들리면서도 무관심한 얼굴로

열심히 걷는 사람들

 

 


 

 

신원철 시인 / 동해안 기찻길 따라서

 

 

만남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려면

동해안 방파제도 좋지만

해안선 절벽을 따라 기찻길을 걸어볼 일이다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며

바다에 바짝 붙은

레일 위를 하염없이 걷다가

아래가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잠시 앉아

기슭에 와 닿는 부딪힘이 얼마나 무량한지

그렇게 땅이 잉태한 생명 얼마나 꿈틀거리는지

 

물보라 피어오르는 언덕의

허리 뒤트는 소나무와

우루루 몰려오는 바다를 맞아볼 일이다

 

-시집 『세상을 사랑하는 법』에서

 

 


 

신원철 시인

1957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 2003년 《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나무의 손끝』(영언문화사, 2003)과 『노천 탁자의 기억』(서정시학, 2010), 『닥터 존슨』(서정시학, 2014)이 있음. 저서『현대미국시인 7인의 시』,『역동하는 시』. 현재 〈다층〉 동인이며 강원대학 삼척캠퍼스 영미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