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미 시인 / 백모란
저 모란은 흰색과 붉은색의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다 저물녘 극락전 앞에 내가 나타났을 때 모란은 막 백색의 커다란 꽃잎을 겹겹이 닫고 있었다 학의 날개 같은 꽃잎 안에 촘촘한 노란 수술을 품고 노란색 수술은 무시무시하게 붉은 암술을 감추고 있었던 것 모란은 환희와 비애라는 두 세계를 손금처럼 정밀하게 나누어가졌다 뜨거운 방바닥에 몸을 누이고 개울 건너편 모란의 기척을 듣다 잠들었다 백모란은 흰색과 모란이라는, 지난여름과 이 봄이라는 극단을 지니고 있기에 마흔다섯 절에서 객사한 명창 백모란과 나는 아프고 나은 몸이라는 낡은 비밀을 지니고 있기에 백모란 벌어진 꽃잎은 노랗고 붉은 꽃술 때문에 캄캄해지고, 아침의 백모란 향은 앞이 안 보이도록 막강해지고 모란이라는 절벽 앞에 나는 위태롭게 서 있다
조용미 시인 / 생에 처음인 듯 봄이
현통사 앞 물가의 귀룽나무는 흰 꽃을 새털구름처럼 달고 나타났지 귀룽나무, 나는 놀라 아 귀룽나무 하고 비눗방울이 터지듯 불러보았지 귀룽나무, 너무 일찍 꽃 피운 귀룽나무 귀룽나무 물가에 가지를 드리우고 바람결에 주렁주렁 흰 꽃향기를 실어 보내고 있네 귀룽나무 새초록 가지마다 연둣빛 바람이 샘솟네 개울물 소리 따라 늘어진 가지의 흰 꽃망울들이 조롱조롱 깨어나네 저 귀룽나무 흰 꽃들 받아먹는 물소리 따라 봄날은 살며시 가는 거지 또 그렇게 가는 거지 건듯건듯 봄날은 가고 귀룽나무 아래 어루만졌던 어떤 마음도 드문드문 아물어가는 거지 누군가 한 세월 서러이 잊히는 거지 아 그리고 생에 처음인 듯 문득 봄이 또 오는 거네 귀룽나무는 물가에서 전생에 피운 적 없는 흰 꽃들을 뭉클뭉클 달고서 나를 맞이하는 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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