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정 시인 / 나무를 읽는 시간
단풍들 둘레길에서 색색의 길을 만들고 있다 한 잎씩 속내 떨구며 숲이 되는 나무 가슴에 별을 달고 서 있다
태어남으로서 목적을 다 하는 나무의 길 뼈대만 남긴 채 형태를 부숴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의 숲이 그윽하다
나무가 말한다 각기 다른 색깔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 서로에게 빛나는 배경이 된다고
노랗거나 빨갛거나 모든 색깔이 하나가 되는 밤은
우리도 나무가 되는 시간
단풍잎의 선율이 저음의 음계로 깔린다 흩날리는 좀생이별이 가슴에 아프게 박힌다
박이정 시인 / 생각차
생강을 썬다 생강은 가지런히 도마를 썰고 도마는 납작납작 의심을 썬다
와글와글 썰리는 생각들 네가 말하고 있는 나는 내가 아니야 옆구리에 뿔 달린 의심 한 토막 앞에 걸린 거울 속에서 긴 외뿔로 불안을 찌르며 잔가지를 뻗는다
거울 속에 비가 내린다 사방으로 떨어져 나간 생각들이 툭, 탁, 툭, 탁, 창가로 몰려온다 토막 난 내가 토막 난 나와 부딪친다 비추어지지 않는 거울 속의 나 거울을 깬다 깨도 깨도 멀쩡한 거울 나는 이런 나야 만져질 듯 말 듯한 거울 속 목소리
토막 난 비가 덜컥덜컥 창문 안으로 들이닥친다 토막 난 의심이 젖는다 토막 난 생각이 뒤섞인다 까만 밤 탁자에 편도선처럼 자라는 말들 도마에 빨간 느낌표가 핀다
토닥토닥 생강을 썰어서 생각을 끓인다 거울이 사라지지 않는 밤 생강차에서 칼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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