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연 시인(서울) / 기억할 만한 지나침
한 눈이 안 보이고 한 다리를 절던 노할머니
저도 따라 한 눈을 감고 한 다리를 절면서 마당을 한 바퀴 돌아봅니다
마루에 모여 앉은 친척들이 웃습니다 박수를 칩니다
노할머니도 즐거워합니다 아주 어릴 적입니다
이제 아무도 웃어주지 않지만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김종연 시인(서울) / 중앙공원
잠시 잠에 들었다 깨어나 떠올린다.
"네가 어디서 왔든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 해준 이 말이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되지 않아 기억은 이것을 자신의 경험이라고 믿는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슬픈 쪽으로 예감이 맞아든다.
미래는 기억을 잃어버렸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어서
이제 일어날 일들이 있고 아직 일어난 일들이 있고
불이 꺼지면 겁이 있고 불이 켜지면 겁이 없다.
이 암전이 극의 인터미션이라고 생각한다.
일어나면 일어나야 할 일이 되고 시간은 진행형이 되면 영영 멈춰버리고
문득 여기서 닮아갈 때까지 오래도록 살고 싶어지니까 키우던 개를 버리면서도 건강을 기원하듯이
복잡하게 더러운 사이에서도 자주 눈이 마주치게 되는 기억은 어디에나 하나 둘씩은 있다.
이제야 중간이고 아직도 중간이다.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균형
어느 곳이든 닿으면 죽어버리는 일기
다른 생각이 되길 기다려 다른 생각을 한다.
"네가 어디서 왔든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이 일은 돌아갈 때까지 여러 번 반복된다.
-『시와 표현』 2018-9월호 <신예 시인 초대석_신작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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