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희 시인 / 뜻밖의 질문
눈이 녹으면 그 흰 빛은 어디로 가나* 그가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는 다만 그 질문을 생각하고 기억하고 상상할 뿐 그 흰 빛의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이 세상에 눈보다 더 눈부신 흰 빛이 있을까 얼마간 의문을 가져보다가 생각은 머릿속으로 하는 혼잣말 같고 날리는 눈발은 하염없이 잃어버리는 목소리 같아
눈이 쌓이고 쌓인 눈 위에 또 눈이 쌓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누구의 기억 속에 얼마나 쌓였을까 거듭 가파른 생각을 한다 어느덧 눈에 눈[雪]물이 차오른다
눈이 녹아도 그 흰빛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눈을 쓸면서 뒤늦게 받아들인다
저 흰 빛만큼 눈부시게 내 생각을 들어올린 구절은 없다
어떤 눈은 너로부터 무너지고 어떤 너는 눈처럼 쌓인다
눈이 와서 하는 일이란 나에게서 오점을 지워주는 일
백색이 모두인 눈의 세계에도 유백 설백 청백으로 나뉜다는 걸 알고 난 뒤 눈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뜻밖의 질문을 받을 때처럼 놀라서 눈길을 오래 걸어 본다
쌓이거나 녹거나 하는 것만큼 긴 문장이 있을까
돌아보니 어느 소설의 첫 문장같이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마침내 뜻밖의 질문이 완성되었다
*셰익스피어
계간 『청색종아』 2022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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