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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태준 시인 / 기러기가 웃는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

문태준 시인 / 기러기가 웃는다

 

 

젊어 남편을 잃고 재가해 얻은 외아들마저 잃은 그녀

언제부터 그녀가 기러기를 기르기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기러기는 매일 북쪽 하늘 언저리를 날다 그녀의 집으로 돌아온다

기러기도 마음이 있어 하늘을 서성거린다고 그녀는 말한다

하늘 끝을 날다 다시 돌아서고 마는 그 그리움의 곡면,

그녀가 기러기를 사랑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오늘은 기러기가 새끼 기러기를 등에 업고 날더라고

하늘 구경을 시키더라고 그녀는 기러기 얘기에 좋아라 한다

누렇게 늙어 누운 오이 같은 그녀가 뜨락에 앉아 웃는다

날지 못하는 기러기가 웃는다

 

 


 

 

문태준 시인 / 평상이 있는 국숫집

 

 

평상이 있는 국숫집에 갔다

붐비는 국숫집은 삼거리 슈퍼 같다

평상에 마주 앉은 사람들

세월 넘어온 친정 오빠를 서로 만난 것 같다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손이 손을 잡는 말

눈이 눈을 쓸어주는 말

병실에서 온 사람도 있다

식당 일을 손 놓고 온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평상에만 마주 앉아도

마주 앉은 사람보다 먼저 더 서럽다

세상에 이런 짧은 말이 있어서

세상에 이런 깊은 말이 있어서

국수가 찬물을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큰 푸조나무 아래 우리는

모처럼 평상에 마주 앉아서

 

 


 

문태준(文泰俊) 시인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1955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학위.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등단.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목월문학상〉을 수상.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