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교리 주간 - 늘 깨어 준비했던 예언자 제1독서 이사 11,1-10 / 제2독서 로마 15,4-9 / 복음 마태 3,1-12 가톨릭신문 2022-12-04 [제3321호, 19면]
청렴한 삶 살았던 세례자 요한 하느님 뜻 찾으려 밤샘 기도하며 세상 죄악과 타락에 당당히 맞서
바르톨로메오 베네토 ‘성 요한 세례자’ (일부). 잘 준비된 예언자, 세례자 요한
언젠가 저희 수도회 국제회의에 참석했다가 새벽녘에 입국할 때였습니다. 잠에 취해 비몽사몽 헤매다가 겨우겨우 세관을 거쳐 입국장에 들어서는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손에 손에 카메라를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물어봤더니, 요즘 잘 나가는 아이돌 그룹 가수들이 저희와 같은 비행기를 탔던 것입니다.
호기심에 저도 가수들이 뒤따라 나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광팬들과 아이돌 가수들과의 만남은 그야말로 순간이었습니다. 자기 앞을 지나가는 순간 가까이서 한번 보는 것,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사진 한번 찍는 것, 그게 다였습니다. 가수들이든, 팬들이든 참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른 시간에 그 촌각의 만남을 위해 꼭두새벽에 집을 나선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토록 큰 매력과 가슴 설렘을 선사하는 가수들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되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인기 역시 하늘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12명 가운데 5명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잘 키우고 훈련 시켜서 예수님께 인도한 제자들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다음의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는 당시 세례자 요한이 얼마나 잘 나가던 사람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태 3,5-6) 보십시오.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일거수일투족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는 다른 예언자와는 철저하게도 달랐습니다. 궁궐 같은 대저택에서 아쉬울 것 하나 없이 떵떵거리며 살던 다른 종교지도자와는 달리 세례자 요한은 집도 절도 없이 황량한 광야에서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입고 있는 옷도 다른 예언자들처럼 잘 나가는 메이커가 아니라 ‘자연산 옷’, 낙타털옷을 입었습니다. 매일 매일이 산해진미의 잔치였던 다른 지도자와는 달리 세례자 요한은 겨우겨우 연명할 정도로 음식을 절제했습니다.
보다 준비된 예언자, 보다 합당한 선구자로 존재하기 위해 세례자 요한은 최고의 다이어트를 한 것입니다. 탐욕과 집착의 뱃살을 빼고, 성냄과 질투의 속살을 빼고, 교만과 무지의 목살을 빼고, 아집과 허영의 얼굴 살도 뺀 결과,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를 위해 언제라도 무대 뒤로 사라질 준비를 완벽히 했습니다. 메시아께서 부각되기 위해서라면 그간 쌓아온 입지나 하늘을 찌르는 인기, 목숨까지도 당장 그 자리에서 내어놓을 준비가 돼있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준비가 돼있던 세례자 요한, 모든 것에서 초월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헤로데의 그 알량한 권력 앞에 조금도 위축되거나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늘 깨어 기도했던 광야의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
예언자로서의 삶, 말만 들어도 왠지 그럴듯해 보입니다. ‘있어’ 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어 보입니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앞으로 몰려 들겠지요.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품위 있고 장엄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는 하늘을 찌르겠지요. 추종자들은 늘 나를 큰 스승으로 떠 받들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세례자 요한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전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위해 밤샘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참 전달자로 계속 존재하기 위해 부단히 화려한 도시를 떠났습니다. 황량하고 고독한 광야로 계속 깊이 들어갔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보십시오. 그의 나날은 그야말로 ‘초근목피’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주식은 날아다니는 메뚜기였습니다. 음료수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들꿀이었습니다. 그가 걸치고 있었던 의상을 보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무슨 원시인입니까? 낙타털 옷에 가죽 띠입니다. 그는 대체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였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결한 영혼을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확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온통 만연해 있는 세상의 죄악과 타락 앞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끝도 없는 자기 비움의 삶, 뼈를 깎는 자기 통제의 연속, 자아 포기, 자기 연마, 자기 부정의 나날이 세례자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목숨 걸고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철저한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예언자로서의 삶, 어쩔 수 없이 고독합니다. 원치도 않았는데,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예언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시는데, 때로 죽기보다 힘든 숙제입니다. 완전 귀 먹은 백성들을 향해, 이미 물 건너간 사람들을 향해, 다시 돌아오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합니다. 거듭되는 외침에도 사람들의 몰이해, 그로 인한 박해는 계속됩니다. 결국 외로운 투쟁을 거듭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과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이 땅 위에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인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란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데 예언자들이 흘린 피는 소중한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한 존재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 소멸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일이 이제 우리에게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 안에 생명의 불꽃을 간직한 사람들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비록 육체는 이 세상에서 자취가 사라지지만 영혼은 더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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