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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양성우 시인 / 부천에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8.

양성우 시인 / 부천에서

 

 

침묵 속에서도 세월은 가고

불볕의 부천바닥 미싱단지 언저리엔 풀잎들만

시드는구나.

이러지 말자 이러지 말자

세월은 가고,

친구들은 지금도 입술을 깨물며

꿈을 자르듯이 손가락을 자르고

쇠붙이를 깎는다.

죽으나 사나 어쨌든 이 땅 위에 발붙이고

살기 때문에

불처럼 타오르는 가슴 누르고 또 누르며,

에라 모르겠다 허리 굽혀 여기저기 기름을 붓고

벽돌을 나르고 큰 못을 박는다. 나무 끝에,

온종일 저려오는 앙상한 팔다리에

꽝꽝꽝꽝... ... ...

일어나라 마른 풀잎,

잠든 마을 구비구비 돌자갈 묵은 밭

몸부림치며, 소리소리 지르며,

 

 


 

 

양성우 시인 / 양벌리에서

 

 

온몸에 뙤약볕 쓰고 터벅터벅

양벌리 가는 길,

보아라 저 짙푸른 언덕 위엔

서울놈들 별장이 들어서는구나.

이미 젊은 아이들 다 떠난

이 골짜기 가득히 침묵만 살고,

이따금씩 으리번쩍 바람처럼

땅 투기꾼들 자가용차만 지나가네.

괜찮아 괜찮아

듣는 사람 없어도 뻐꾸기는 울고

시절이 병들어 양벌리 가는 길,

누가 알까? 보이는 것마다 남모르게

나를 울리고

풀죽은 논배미 어린 모포기들

이 가슴 송곳처럼 찌르는 것을.

 

 


 

 

양성우 시인 / 이태원에서

 

 

아직은 이 고삐 풀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여전히 이리저리 떠밀리고,

이러지 말자 이러지 말자 아무리 고개를

가로저어도

웬일일까? 이 아픔이 가슴 속에 사무치는 까닭은.

끝없이 쌓이는 어둠 속에

밟히고 찢어지고 그렇다 나도 모르게

토막났을지언정

이곳은 분명히 내 땅은 내 땅인데.

무서워라 무서워라 낯선 사람들 틈에

나는 병신처럼 움츠러들고,

공연히 공연히 사시나무 떨듯 하는구나.

헬로우, 왜 그러냐고 묻지 마라.

이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진실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은 이 고삐 풀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전혀 타의로 침묵하고,

우스뭐라 우스워라 발버둥을 쳐도

내 땅에서 오히려 남의 땅 한가운데

사는 것만 같으니.

이러지 말자 이러지 말자 아무리 고개를

가로저어도

웬 일일까? 온몸의 피 바닥까지 타고

이 아픔이 가슴 속에 사무치는 까닭은.

 

 


 

양성우(梁性佑) 시인

1943년 전남 함평 출생. 전남대학교 국문과를 졸업, 숭실대학교 대학원을 수료. 중등학교 교사. 1970년 문예지 <시인>에 시 <발상법>과 <증언>을 발표, 등단. 1972년 첫 시집 『발상법』 『신하여 신하여』 『겨울공화국』 『북 치는 앉은뱅이』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5월제』 『그대의 하늘길』 『세상의 한가운데』 등. 1975년 시집 <겨울공화국>의 필화사건으로 구속 수감, 광주 중앙여고 교사 파면. 1977년 일본 [세계]지에 게재된 시 <노예수첩>으로 국가 모독 및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피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