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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구경 시인 / 형평사(衡平社)4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5.

박구경 시인 / 형평사(衡平社)4

​ㅡ한(恨)

 

 

누가 어떻게 부인하고 지우려 하여도

우리의 뿌리는 북방의

유목 민족이었더라

 

오래전 이 땅에 흘러와 백성과 다를 바 없는

백정으로 정착하면서

고기와 가죽을 팔아 살아가는 민생이었더라

 

하나같이 키가 컸고 골격이 좋아

이목구비도 수려한 사람들이었더라

세력이 없었던 이민족일 뿐이었더라

유교를 머리 위에 받드는 새 왕조가 서자

남자는 노(奴)가 되고 여자는 비(婢)가 되는

철천지원의 세월이 우리를 짓눌렀더라

 

오랑캐들의 침탈로 누란의 위기가 닥칠 때면

선두에 나가 전장을 누비던

용맹무쌍한 사냥꾼들이었더라

 

하지만 우리들의 현실은

핍박과 멸시의 대상으로

실체가 없는 증오의 이름이었더라

 

사람의 형상이되 사람이 아닌 짐승들이 되어

출생의 멍에를 짊어지고

이마에 불도장을 새겨야 하는 악이 되었더라

 

왕과 관리와 벼슬아치들은 알까

우리의 한을

오백 년 동안이나 이어져 내려온 피눈물들을

 

백정은 사람의 종자였더라는 걸 알까

여인을 사랑하고 자식을 낳고 나라에 임하였던

백정은 백성의 또 다른 이름이었더라는 사실을

 

 


 

 

박구경 시인 / 장마통

 

 

비 오는데

알전구 하나만이 흔들린다

그러니까

그 우산 아래가

나의 밤이며 침잠이다

그래서 나는 또

고구려같이 먼 곳에 가서

우거진 빗속의 밥 연기이고 싶다

고기 굽는 연기이고 싶다

싸움터에서 돌아온 진창 속의

 

 


 

박구경 시인

1956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 1996년 《문예사조》에 <하동포구 기행> 등 5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진료소가 있는 풍경』 『기차가 들어왔으면 좋겠다』 『국수를 닮은 이야기』 『외딴 저 집은 둥글다』 『형평사를 그리다』 등이 있음. 경남일보 기자를 지냄.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경남작가회의 회원이며 '얼토' 동인으로 활동 中. 제1회 '경남작가상' 고산 윤선도문학대상, 토지문학제 하동문학상 수상. 현재 사천시북사동 보건진료소장으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