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찬 시인 / 새벽, 종착지
젖어든 동공 속으로 한 사내가 빨려드네
몇 개의 객실을 비워둔 채 신풍모텔의 간판이, 역 앞 광장을 비추던 서치라이트의 잔광이 텅 빈 좌석을 비추듯
밤이 이슥한 건 그런 뒤를 남겨 놓아서일 것
한참을 내달린 뒤라서 끝내 마주하지 못하고 돌아선 거긴 어디든 이편과 저편, 누구든 그이와 내가 되는 곳
어디쯤 왔을까 두리번거리면 안은 밖을, 몸은 가지런히 모은 두 발치를 향해 덜커덩 덜컹
미처 손 흔들어주지 못한 뒤를 곰곰 좇다 몇은 졸고 몇은 곤히 잠든 새벽 우수리 같은 남루를 견디며 깨어 뒤척이는 불빛 몇 창의 얼룩들이 엇비슷한 속내를 들키고야 마는 여기는 그 어둠의 바깥
내려야 할 곳에 내려야 한다는 강박이 건너 창가의 여인을 흔들어 깨우네
서둘러 외투를 여미네 간신히 남겨진 것들의 배후가 되네
이광찬 시인 / π
한 조각을 먹었든 한 조각이 남았든 세시 반의 얼굴은 출출, 금세 또 테두리가 지워지고 없습니다
토핑처럼 밤새 내리는데 쌓이지 않고 눈은 얼마간 얼룩으로나 앉겠죠 지우려 애쓰지 않아도 지워지고 말 텐데 위궤양에 걸린 괘종시계는 쉴 새 없이 휴지를 뱉어내고 있습니다 따분하다는 듯 꼬챙이에 꿰인 지구가 몸을 뒤챕니다
그래봐야 제자리, 한 데 그러모아 눈사람을 만들어 볼까요
새로 자란 혓바닥은 그런대로 얇고 부드러운 엠보싱을 깔아놓고 아침을 기다립니다 왜냐고 묻진 말아요 무언가를 마냥 기다리는 일은 영 파이라서 말인데 또 한바탕 코피를 쏟을지도 모르죠
그러니 부디 아끼지 마시길, 아직은 커피 한 모금이 달고 젖은 몸 채 식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느슨하게 풀어졌던 하루를 되감던 시계가 올 풀린 벽의 실금들을 지우느라 안간힘입니다 그럴 필요 없다는데도 한사코 제 스스로 태엽 감을 수 없을 때 안으로 감겨 있던 것들이 줄줄줄 새어나와서 크-응, 무심코 코 풀어버린 날들의 연속이었죠, 어제는
다 쓴 휴지 같아서 매일 매일이 내겐 새로운 재활용이라서 내일, 내일은 기필코 오지 않을 것이기에 둘둘 말려 있는 내 인생 마음껏 풀어 쓰시라, 신신 신께 거듭 당부합니다, 당신!
계간 『문예연구』(2022년가을호-2022년 전국계간문예지우수작품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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